우연의 익명

Meet Perry There | 12.

by 성게를 이로부숴

페리와 헤어지고 구 시가지를 산책했다.


비가 내렸지만 회랑을 따라 걸으면 비를 맞지 않고도 산책할 수 있었다. 빵집을 제외한 모든 가게는 아직 굳게 잠겨 있었다. 구시청사 정문 역시 한산했다. 이대로 호텔로 돌아가기 싫었지만 추운 겨울 아침에 바깥을 계속 쏘다니기도 피곤했다. 어딘가 따뜻하고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쉬고 싶다. 로키가 보낸 책도 아직 남았고, 해뜨기 전부터 걸어 다녔더니 몸이 영 개운치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새오를 만났던 카페로 갔다.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지만 찬 공기를 막기 위해 드리운 암막 커튼 때문에 안 쪽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찬 바람이 부는 겨울 카페 입구에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로키가 나를 찾아낸 것도 같은 이치인가.’


그러고 보면 사람은 매우 단순하게 살아간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의 동선을 찾아내는 일이야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사람들은 일상을 반복하며 보안에 취약한 일생을 산다. 페리의 일상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며칠만 관찰하면 그가 몇 시에 일어나 몇 시쯤 어떤 길로 출근하고, 어디에서 점심을 먹고, 어떤 길을 따라 퇴근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커튼을 걷고 2층에 올라가 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우연이라면 뮌스터에 머무는 동안 또 만나겠지. 그게 정말 그렇다면.’


나는 페리와 로키를 만나게 하고 함부르크에서 뮌스터까지 나를 인도한 압도적인 우연에 모든 일을 맡기기로 했다. 결국 비를 더 맞고 다니기 싫어 호텔로 돌아갔다.


나는 나의 작은 방으로 돌아와 하리처럼 느긋하게 목욕을 즐기고 음악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내키는 대로 잠을 잤다. 눈을 뜨면 알자스 포도주를 마시고, 간치즈 요리를 먹고 싶다. 헤르미네도 만날 수 있을까. 몽롱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책을 보다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오후였다. 습관처럼 로비로 전화를 해 커피를 시켰다.


“아, 주문한 가운.”


금방 노크 소리가 났다. 여유롭게 커피를 받았다. 마침 주머니에 있던 2유로짜리 동전을 꺼내 팁으로 건넸다.


“좋은 오후입니다.”


매우 친절한 인사.


“불피우스 씨도 좋은 오후!”


그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지요?”


“명찰이 있잖아요. 잘 보이는데요.”


“그렇군요! 탐정 같으십니다. 그럼 문을 닫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또 말씀하세요. 탐정 님!”


재미있는 사람이다. 나는 왠지 가면을 쓰는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뻔뻔해져 넉살이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누구가 됐든 사소한 농담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괜찮은 변화라고 느껴졌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창가에 의자를 바짝 끌어 놓고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셨다. 해가 기울 때까지 이렇게 있다가 가운을 찾으러 가면 되었다. 무언가 속이 후련했다. 돈을 쓰기만 하는 일상은 이토록 후련한 가. 돈을 벌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 연회나 이브닝 파티를 구상하는 귀족들의 일상, 규칙적이고 정갈한 소시민들의 일상. 그리고 매일 죽기만을 고대하는 하리의 일상에 대해 생각했다. 하리는 그 일상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었다. 문득 호숫가에서 만난 새오가 떠올랐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그녀의 일상을 추리했다. 한국에서 본 그녀는 어느 정도 이상적일 만큼 도시적인 데가 있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만난 그녀는 산과 들을 제멋대로 뛰어다니는 시골소녀 같았다.


“도펠갱어 아냐?”


이 도시에선 누구의 그림자도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그림자를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페리가 장난이라고 하든, 로키가 무슨 일을 꾸미든 나는 내키는 대로 나의 ‘그림자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아직 부츠가게도 찾지 못했다. ‘북쪽으로 가라’는 마부 할아버지의 말이 적힌 노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페이지에서 축축한 말똥냄새가 났다.


창밖 나무는 생명의 온기를 느끼려 비벼대는 축축한 대기에 뿌옇게 코팅되어 가고 있었다. 포근한 호텔 방을 왔다 갔다 하며 가볍게 옷을 챙겨 입고 레인코트를 걸쳤다. 헤드셋에서 Strollin’ 앨범의 첫 곡이 흘러나왔다. 자욱한 안갯속에서 시작되는 쳇의 트럼펫 소리는 고독한 늑대의 울음소리 같았다.


아케이드의 입구에 들어섰다. 우주의 한 복판에서 빛의 온도를 재는 일이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것 같은 기억처럼 떠올랐다. 여행이란 아주 잃어버렸던 것 같은 사유의 추억을 되찾는 일이다.


“무엇을 찾고 있지요?”


딱딱한 악센트를 가진 발음. 지난번과 다른 할머니였다. 이 나라의 노인들은 모두 제 각각의 악센트를 가지고 능숙한 영어를 구사한다. 알파벳을 공유한다는 것이 이토록 편리한 일임을 깨달았다.


“화요일에 주문한 것을 찾으러 왔습니다. 이니셜이 있는 실내복입니다.”


“이름이?”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R입니다.”


“주문한 영수증을 보여주겠어요?”


“잠시만요.”


지갑 속에는 카페 파블로의 바를 지키고 있던 덩치에게 보여주기 위해 과장된 몸짓으로 넣어 두었던 영수증이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져 있었다. 그것을 되도록 깔끔하게 펴서 건네려다 이번엔 샘 스페이드가 되기로 했다. 그러면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하게 뭉쳐져 있던 영수증을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겠지. ‘자기는 천사야’ 같은 느끼한 멘트를 날리면서.


나는 아직 변장술에 능숙한 탐정이 아니었다. 멋진 탐정이란 양심의 가책 없이 무수한 인물로 변신하는 법이다. 혈관에 피가 아니라 강철을 돌리는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평생 창조된 하나의 존재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이리가 살아가는 방법이란 타락한 방식이겠지만.


가운을 찾아 건너편 카페 파블로로 들어갔다. 모두 처음 보는 점원들이었다. 전날과 같은 자리에 앉아 알자스 와인을 주문했다.


“죄송하지만 모젤 게뷰르츠트라미너로 괜찮으실까요?”


“달콤하지 않은 것이 좋겠는데….”


“그렇다면 리슬링은 어떠신가요?”


고개를 기울이자 점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는 와인굿에서 직접 와인을 받습니다. 항상 그 해의 가장 맛있는 와인을 가져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드실 겁니다.”


검은 조끼를 입은 점원이 차갑게 준비된 병을 가지고 왔다.


“맛을 보시고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샤르도네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닙니다. 이걸로 하죠.”


그는 매우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따랐다.


“가볍게 먹을 만한 것이 있을까요?”


“키쉬 로랭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달걀 파이에 파와 돼지고기 슈펙을 넣은 오리지널 레시피입니다.”


점원은 우아한 목소리로 리드미컬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와 몸의 움직임에 맞게 부드러운 질감의 그림자가 아른댔다.


“그걸로 하죠. 고맙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홀을 가로지르는 그의 그림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림자에는 그 물리적 본체를 닮은 무언가 가 서려 있기라도 한 걸까. 나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조명 때문에 발 안 쪽에 꽉 눌어붙어 답답해 보였다. 나는 그 녀석을 늘려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점원이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촛불이 담긴 컵을 내려놓았다.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이 되면 카페 파블로는 초를 켰다.


“촛불은 여러 개의 색이 다른 그림자를 만들죠.”


발아래로 동트기 전 호수의 물속 같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로키?”


“아직도 안 돌아갔습니까?”


“유럽을 여행하는 모든 사람이 다 관광객은 아냐.”


“처음과는 좀 달라 보입니다.”


이 녀석은 이도 저도 아닌 취향 없는 관광객 취급을 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요 며칠 동안 나의 취향의 차원이 달라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충분히 이 여행을 즐기고 있거든. 함부르크와 뮌스터를 오가느라 바쁠 텐데. 일상에 어느 정도의 생동감이 필요하다는 거 충분히 이해해. 그렇다고 순진한 여행자를 놀리면 안 되지.”


로키는 이를 드러내지 않고 반듯한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생동감을 연출해야 할 만큼 지루하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페리를 신뢰하는 거라면 더 이상 제가 해 줄 말은 없겠군요. 인생이란 다 각자 책임을 지고 시간을 써야 하니까요.”


“그래. 동감이야. 참, 북쪽으로 가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북쪽으로 가라면 북쪽으로 가 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려울 게 없어 보이는데요.”


녀석은 수프를 주문했다. 커다란 골격을 지탱하고 있는 군살 없는 배가 허기져 보였다.


“배고파?”


“네.”


나는 로키를 위해 키쉬 로랭을 하나 더 주문했다. 푸근하게 올라오는 김과 부들부들한 달걀 파이 속에 짭짤한 베이컨과 향긋한 파가 들어 있었다. 나이프로 자르기가 미안할 만큼 부드럽게 갈라지는 파이에서 오르는 뜨거운 김을 즐기는 재미로 먹는 음식이었다. 모젤 리슬링에서 비가 막 마른 포도 잎에서 나는 향긋한 풀 냄새가 났다.


“아무리 그래도 점심도 안 먹었단 말이야?”


“빵을 싸 갑니다.”


“도시락?”


“네.”


“직접? 아니면 여자친구? 혹시 아직 엄마가?”


“직접 쌉니다.”


저 덩치에 매일 아침 자기 주먹보다 훨씬 작은 빵을 조심스럽게 가른다. 버터를 바르고 물기를 말린 양상추를 털어 조심스레 얹고, 손톱보다 얇은 치즈를 찢어지지 않도록 올리는 일을 한다니.


“혹시 도시락 통에 귀여운 곰돌이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고?”


로키는 역시 보기 좋게 부드러운 키쉬 로랭을 잘랐다. 부드러운 달걀이 흘러내릴 법도 한 데 단 한 번 실수 없이 파이와 달걀, 베이컨, 파를 적당히 분배에 포크에 올렸다.


“그런 얘긴 어디서 들은 겁니까?”


“비밀이야.”


“뭔가 한 참 잘못 가고 있는 것 같은데. 북쪽으로 가는 거면 함부르크로 다시 올라갑니까?”


로키가 고개를 흔들었다.


“별 아이디어가 없으면 관둬.”


“그 자식한테 네오페디아 얘기도 했습니까?


나는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저녁 카드가 있나요?”


“클뢰쎄와 로트콜을 곁들인 오렌지 소스 오리가슴살 요리가 있습니다.”


“좋네요. 그걸로 하죠.”


“포르투갈 레드 와인을 추천합니다.”


포르투갈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두로 강 쪽 와인인가요?”


“네, 맞습니다. 와일드 베리와 유칼립투스 향이 납니다. 잘 아시는군요! 마침 최근 빈티지는 몇 병 남지 않았답니다.”


점원이 기분 좋게 웃었다. 꼭 맛보고 싶었던 와인이었다. 로키는 소고기 필레 스테이크와 새우구이를 주문했다.


“물어볼 게 있어. 솔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좋겠는데.”


“페리에게 네오페디아에 대해 물어봤습니까?”


로키는 바위 같았다.


“페리에겐 아무 말 안 했어. 류노스케 씨 일에 대해서도 말이야. 페리는 아무것도 모를 텐데 다짜고짜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거든. 네오페디아에 대해서는 너에게 물으면 되고.”


로키는 냅킨으로 입을 닦고 다시 나이프를 들었다.


“자. 그럼 이제 내 차례야. 정말 포르토에 왔었어? 작년 12월. 나를 감시라도 하러 온 거야? 그때부터?”


“유칼립투스를 좋아하나 보죠?”


나는 로키가 다음으로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포르투갈의 숲에는 경계가 없어서 해가 무척 잘 들어요.’


오포르토의 해변 레스토랑, 마노엘이 떠올랐다.


“포르투갈에는 잎이 갈라진 나무가 많다고. 꼭 유칼립투스 만은 아냐. 부드러운 소나무 향도 좋고.”


“사시사철 해가 내리쬐는 곳이죠.”


“유칼립투스란 무슨 상징인가?”


별 영양가 없는 소리에 로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이 밝게 켜진 캄캄한 그림자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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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스터란 그런 도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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