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관념부터 기다림의 미학까지(ft. 어린이용 쇼핑카트)
독일마트에는 특이한 것이 있다.
바로 어린이용 쇼핑카트, Kindereinkaufswagen.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도 몰 수 있을 만큼 작은 사이즈의 이 카트는 자칫 평범해 보일 수 있지만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되돌아보면 나는 결혼해서 독립하기 전까지 나 스스로 장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엄마의 심부름은 종종 했지만, 품목은 정해져 있었고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거라곤 심부름에 대한 대가를 빌미로 간식 몇 개 고르는 정도.
그런데 걸음마를 막 뗀 아이에게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줘보니, 이게 얼마나 아이에게 자기 결정능력을 길러주고 자기 효능감도 느끼게 해 주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엄마아빠의 영역으로만 여겼던 쇼핑에 본인도 한 독립된 개체로 참여하며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본인도 어른처럼 카트를 끌고 마트를 다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는 행복해했고, 본인이 원하는걸 직접 골라 카트에 담을 때면 얼굴에 뿌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아이에게 모든 결정권을 주는 건 아니다.
아이는 아이인지라 쇼핑계획에 없던 제품을 골라오기도 하고, 초콜릿 코너에 지나갈 때면 괜히 작은 목소리로 "초콜릿 사고 싶다"를 연신 중얼거리며 내가 대꾸를 하지 않으면 졸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간이 바로 하이라이트, 핵심이 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물건이 왜 필요하지 않은지 차근차근 설명해주기도 하고, 때론 설명이 필요 없이 안 되는 물건은 안된다고 단호히 이야기하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다행히도 이렇게 대화를 했을 때 아이가 심한 투정을 부린 적이 없다.
아이도 안다. 어떤 건 엄마가 별로 안 좋아하는 건지, 본인이 고르고도 눈치를 보게 되는지.
그 부분을 아이가 예상한 대로 짚어주고 일관성 있게 통제하거나 적절한 이유가 있다면 허용을 해주는 게 아이에게도 안정감을 준다.
또한 이 모든 과정에서 아이와 많은 대화를 하게 된다.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상의 육아, 교육이 어디 있을까.
아이가 늘 고르는 품목 중 하나인 짜 먹는 요거트.
처음에 아이는 당연히 '당장' 요거트 뚜껑을 따달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이야기한다.
"이건 이따가 마지막에 카드로 띡! 계산을 다 마치면 먹을 수 있는 거야."
어른이 명확하게 룰을 설명하면 아이도 따른다.
비록 계산함과 동시에 숨이 빨라지며 손에 요거트를 꼭 쥐고선 엄마가 당장 따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우리 사회에서의 룰을 배우고, 힘들어도 참고 기다리는 이 모든 과정을
인위적이지 않게, 마트에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건 참 좋은 육아환경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주의할 점도 분명 존재한다.
아이가 너무 흥분해서 카트를 거칠게 몰고 돌아다니거나, 뒷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복도 한가운데서 길막을 할 수 있으므로 늘 예의주시해야 한다.
사실 카트에는 어른 높이에 맞는 손잡이가 달려있어서 언제든 내가 직접 컨트롤할 수 있다.
또한 간혹 아이가 카트 밀기가 귀찮다며 중도포기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차라리 처음부터 일반카트를 가져와서 아이를 앉히고 다녔으면 한결 편했을걸,
이제는 한 손으로는 어린이카트, 다른 한 손으로는 도망가려는 아이를 잡으러 다니며 진땀을 빼기도 한다.
사실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아이에게 직접 쇼핑카트를 맡기고 쇼핑을 한다는 게 하등 좋을 게 없다.
아이 없이 마트에 가서 내가 필요한 물건만 재빠르게 집어와 계산하거나
같이 간다고 하더라도 아이는 카트에 앉히고 내 주도로 쇼핑을 마치는 게 시간도 에너지도 절약된다.
굳이 언제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는 아이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마트 구석구석을 누비고, 설명하고, 타협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포기해야 하는 것도 응당 있어야 하는 법.
내가 이 방법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와 일상을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어른들의 문화를 익히고, 사회의 규칙을 따르는 법을 훈련하고
본인이 먹고 싶은 것을 스스로 고르고 엄마와 대화를 통해 타협도 해보며
타인과의 의사소통능력을 자연스럽게 기르기 위함.
어린아이도 한 개체로 존중받으며 이 세상에 자연스레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곳곳에 장치를 마련해 둔 독일.
매일같이 가는 마트에서 자연스레 접하는 일상의 육아.
비록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일은 더 많아지지만
이제 모든 걸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아이에게 이 시간이 좋은 징검다리가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