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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 et Moi Jul 09. 2022

사랑이라는 환멸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관객에게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울 수 없는 것이라고 포장하지만, 환상을 걷어내고 현실적 돋보기로 보자면, 사랑의 환멸을 일으키는 영화이다. 판타지 충족해야 하는 영화이기에 낭만으로 포장했지만 말이다. 결국 영화상 결말의 낭만은 뒤로하면, 그 둘의 추억도 사랑도 어찌 됐건 모멸감과 환멸감으로 가득 찬 채로 결론지어져 있었다. 그래서 끝이 나야 했고 끝이 났던 관계이다. 


끝나야만 했던 관계 그럼에도 질리도록 인연의 끈이 질기고 질겨서.. 기억을 통째로 날려버려야만 했던 사랑이다. 기억을 삭제해야만 그나마 숨통을 틔울 수 있을 정도로 절망적이고 파괴적으로 만드는 사랑이었다. 피폐한 몰골이 말하듯이, 도무지 사랑을 할 수가 없는 상태로 만들고, 상대를 모르는 내가 되어서, 미련에 또다시 말려들어가지 않으려, 복수심에라도 덩달아 기억을 삭제해 버리는 덜컥거리는 미숙하고 대혼돈의 관계였다.


기억을 살리든 살리지 않든 결말이 매번 관계의 끝이 반복이라면, 차라리 사랑의 불구자가 되는 편이 나을까? 이런 잔혹동화를... 난장과 파국을 불러오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을까? 지지고 볶고 머리털 쥐어뜯게 싸워도, 깨끗이 기억을 지우고 지워도 다시 맞물리게 된 관계성 내지는 심리적 연결성은 무엇일까? 완전히 끝나버린 관계에 불씨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무의식적 힘은 이토록 강력하다고 해석하면 그만일까? 그만한 대단한 인연이라고 칭송해야 할까?


사랑의 씨가 메마르고 척박하고 메마른 상태로 서로를 내몰리게 만들었음에도, 다시 사랑으로 생기가 가득 차오른 두 사람의 얼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서로가 매한가지로 똑같은 결말에 이르더라도 다시금 사랑하세요! 라며 다시 신기루를 만들어야 하나. 어찌되었건 내게는 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자들의 사랑법 중 하나로 보인다. 


영화상에서 그려지지 않지만, 똑 닮은 상처와 결핍으로 만나는 관계 말이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의 상처를 낫게 해 주고 매워주기만을 채워주기만을 바라는, 이를 의식할 수 없으니 소망하지만 의식적으로 소망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은 마음의 상처는 그 상처를 낫게 해 줄 사람보다는 그 상처를 기가 막히게 소금을 뿌리며 더 후벼 팔 수 있는 사람에게 확 눈에 잘 띄는 법이다. 그리고 마침내 꼭꼭 숨겨두고 덮어둔 무가치감, 절망감, 깊게 묻어버린 부정성 등등을 아주 쉽사리 서로가 건드린다.


냉정하게 아니 현실적으로 자신의 결핍도 상처도 치유를 남에게 떠맡기고 내맡긴 상태라면 인생 어디에도 구원자는 없다. 상대에게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상처를 맡긴다는 것이 결코 채워질 리 만무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질 듯 환상을 꿈꾸지만, 현실은 이루어질 수 없음에도 여전히 이상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막연히 믿고 마는.. 아마도 똑같은 상처를 입었기에 나의 맘을 알고 이해할 거라는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관계성을 만든다. 참으로.. 할말하않 역동임에는 틀림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사랑이 그렇게나 낭만적으로 흘러갈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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