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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i et Moi Apr 11. 2021

버티기와 견디기

  문제가 있지만 체념한다. 도무지 문제를 풀어나갈 방도가 없다. 문제에 갇혔다. 이러한 경우에는 대게 오직 버팀과 견디면서 그저 고통이 멈추기만을 기다린다. 왜 이토록 꾸역꾸역 버티며 참으며 삶을 살아가야만 할까? 과거 세대 만해도 참을 인 3번만 새겨라고 조언하며 인내할 것을 삶의 지혜처럼 전해주고는 했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부당하게 부딪힌 상황에서 눈치 보며 꾹 버티는 것만이 정답이었고, 이 악물고 참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역사를 지나온 것이 개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대물림되고 있는 걸까? 그러니 해방될 수 없다. 구원자가 오지 않는 이상 말이다. 


  자기 문제는 자신이 풀어야 하는데, 구원자만 기다려서는 시간이 낭비된다. 그리고 정말 구원자가 있기나 할까? 구원은 스스로 해야 한다. 이를 직시하지 않으니 닥친 문제 상황 앞에 체념만이 남는다. 딜레마를 풀지 못하고 문제 상황에 스턱 되어 있다. 환경과 상황적 영향력에 압도되어 있다. 빠져나올 탈출 방법이 없다고 여긴다. 버티며 견디고 있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 장담할 수 없다. 인생 만고 시달림 끝에 그저 위로와 위안이 필요할 뿐이다. 그럼 또 버티고 견뎌 나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버팀과 비례해 체념할수록 커지는 게 있다면 무력해짐으로써 유독 스스로가 밉고 싫은 날을 겪게 된다. 그런 날이 스쳐 지나가면 좋으려 만, 그런 날이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지속된다면... 더 이상 내가 아니면 나 자신이 아니라면 나아질까?라는 의문이 든다. 아니면 날 추락시키는 기억만 지우면 좀 나아질까? 혹은 사라진다면 어떨까?라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 더 이상 위로와 위안도 먹혀들어가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주위를 살펴봐도, 스스로에게도 자신을 위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진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과 고독 속에서 말라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행복한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일말의 작은 희망도 피어오르지 않는 상태 속에 머문다. 나름 벗어나려 했기에 번뇌와 괴로움에 시달려도 보았지만, 끝끝내 저 깊숙한 곳에 남는 건 또다시 고통일 뿐이라는 처참한 결과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만을 알게 된다.


  결국 남는 건 상실감과 고독, 허망, 외로움뿐이라면... 그래도 살아가려고 상처를 아무리 억누르고 감추어 보려 해도 상처가 덧날뿐이다. 더 이상 자연치유조차 불가능한 상태이다. 더욱 상처에 휩싸이고 압도된 상태로 번져가기에 자신을 힐난하기에 바빠진다. 예를 들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클레인멘타인은 자신을 추락시키는 기분에서 벗어나고자 기억을 지워버린다. 부부의 세계 지선우는 이겨내는 듯 보였으나 자살을 시도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질병에 걸리고 만다. 하지만 이 모두 진정한 문제에 접근 조차 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발발한 것이다. 끝내 본질적인 어려움에 접근하지 못한다면, 벗어나지 못한다면 고통 속에 으스러지게 살아가거나,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고통 자체와 동화되어 괴물을 닮아가거나, 미신적 망상 상태에서 견디는 방법만이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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