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서 몇 발짝 떼자, 파리를 떠나기 전 아들이 다녔던 유치원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에꼴’이 붙었으니, 학교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만 3세에 ‘에꼴 마떼흐넬(école maternelle)’이라 불리는 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우리 집에서 나서면 바로 보이는 대각선 거리에 있었다.
학교 정문에 서자, 하굣길에 아이 손을 잡고 디저트 가게에 들렀던 날들, 도화지 가득 그려온 아이의 그림, 학교 행사에 참여하던 풍경들이 소나기처럼 후드득 떨어지듯 떠올랐다.
파리 유치원 입학식
학교에 입학하던 날, 살짝 긴장된 마음과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교문에 들어섰다. 노란색 복도 벽에는 아이들의 사진과 이름이 가지런히 붙어 있었다.
“엄마! 저기 내가 있어!”
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얼른 내 손을 잡아끌더니, 배정된 벽 고리 앞에 섰다. 그리고 나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온통 새로운 것들 속에서, 자기 얼굴 사진을 발견한 아이는 무척 신이 나 있었다. 엄마인 나는 왠지 모를 뿌듯한 마음으로 사진을 바라봤다. 낯선 환경도, 처음 만나는 선생님도 아이가 품은 기대감을 주춤하게 만들지는 못했는지 아이는 연신 들뜬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살폈다.
입학 첫날, 우리가 학교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고리에 가방과 잠바를 걸어두는 일이었다. 첫번째 미션을 위해, 학부모와 아이들은 아이 이름이 적힌 고리 앞에 모두 함께 섰다. 부모는 아이가 혼자 해낼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며, 무사히 마치기를 기다렸다. 마치 아이가 처음 치르는 시험에 초대된 것처럼, 학부모들은 뒤에서 숨죽여 아이를 응원하고 있었다. 참을성 있게 지켜봐 주는 부모 앞에서, 가방과 옷이 제자리에 놓인 걸 확인한 아이들은 ‘해냈다’는 뿌듯함에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껏 신이 난 표정으로 부모의 손을 꼭 잡고, 나란히 긴 복도 줄을 섰다.
학부모들은 순서를 기다려 차례로 교실에 들어갔다. 앉아 계신 선생님과는 주로 아이의 컨디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부모 손을 꼭 잡고 선생님과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수줍은 얼굴로 선생님에게 다가가 볼 뽀뽀를 해주었다.
재미있던 것은 아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볼을 맞대어 비주(bisou) 인사를 할 수도, 손을 마주칠 수도 있었다. 복도에서 선생님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교실로 입장하는 과정이 우리의 첫 번째 오리엔테이션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부터 매일의 풍경이 되었다.
두 번째 오리엔테이션은 학교 강당에서 진행되었다. 학교는 교사 한 명이 모든 아이를 돌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잠바 입는 법’을 우선으로 가르쳤다. 방법은 바닥에 옷을 거꾸로 놓고 두 팔을 앞으로 넣은 뒤 공중으로 돌려서 입는 것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에 아이들은 시범을 보이는 선생님에게 집중했다. 만 3세 신입생들은 부모 참관하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작은 팔을 잠바 속으로 쑥 뻗어 서서히 돌려 입기를 시도했다. 곧 모든 아이가 잠바 혼자 입기에 동참했다. 입기 실습으로 강당 전체는 색색의 잠바들이 휘저어지며 공중을 나르고 있었다. 마치 작은 축제라도 열린 듯 강당은 떠들썩했다. 이곳저곳에서 ‘스스로 입기’에 성공한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자, 여기저기서 뿌듯한 축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한동안 실습에 전념한 결과, 일종의 규율처럼 여겨졌던 ‘혼자서 잠바 입기’는 입학 첫날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듯했다.
우리는 집에서도 여러 번 연습했다. 아이가 잠바 입는 데 익숙해지도록, 코트를 옆에 두고 함께 연습했다. 어른인 나에겐 굳이 필요 없는 방식일 텐데도 한동안은 신기해서 나도 바닥에 겉옷을 펼쳐놓고 세 살 아이처럼 옷을 입었다.
학교에서의 장면들이 생각나 잠시 나에게 목적지가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붙박여 서 있다, 학교 문패를 한 번 쓰다듬고 추억의 장소를 벗어났다.
15구 파리 집
문득 좋아했던 제과점이 아직 있는지 궁금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알랭 샤바와 샤를로뜨 갱스부르가 주연한 영화 ‘결혼하고도 싱글로 남는 법’에 나왔던 제과점이다. 한창 즐겨 보던 영화여서인지 그 시절 동네 주민으로서 알량한 부심이 있었는데, 그 자리 그대로 남아있는 걸 보니 괜스레 반가웠다. 마카롱이 맛있는 집이었지만 가격이 조금 비싸 자주 가진 못했음에도, 제과점이 마치 내 오랜 단골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도로 너머로 드디어 내가 살던 집이 보인다. 우리 집이다… 집에 왔다. 미색 페인트로 새롭게 단장한 모습이 말끔하다. 낙엽 색이 사이사이 포인트를 주는 단정한 인상 덕분인지, 어둑한 밤에도 우리 집만은 훤히 보였다. 아마 집이 거적때기를 걸쳤다 해도 나는 단박에 우리 집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집을 보니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졌다. 바로 너른 로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을 따라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빛을 향해 맹목적으로 날아들고 싶었다.
우리가 살던 방은 작은 스튜디오였다. 파리에 정착하며 얼마의 생활비가 들지, 얼마큼 아껴 살아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아, 일부러 작은집을 얻으려고도 했다. 그때 만난 집이 파리 15구 집이다. 대신 운이 좋게도 창을 열면 에펠탑이 가까이 보였다. 집을 처음 보러 갔을 때, 에펠탑이 창문 너머로 보였던 그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에펠탑은 어둑해지면 정시마다 수만개의 조명이 켜지며 황금빛 반짝 쇼를 했다. 아이는 그때마다 자신의 ‘아기 의자’를 가져와 창가에 붙어 섰다. 덕분에 매시마다, 의자에 올라 반짝 쇼를 보며 신나 하는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이와 나는 다른 일을 하다 가도 정시가 되면 창문을 열고, 5분간의 반짝반짝 쇼를 관람했다. 힘든 일이 있어도 반짝이는 에펠탑과 아이의 눈망울 속 빤짝임을 보면 그 안에 위안이 있었다. 그 시절 15구 파리 집은 우리에게 아담하고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마침, 입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이 건물에서 나오며 출입할 기회가 생겼다. 잠깐 사이, 고민했다. “따라 들어가 볼까?” 하지만 현재의 나는, 입주민도 아닌 건물의 보안 코드도 잊은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마음은 한달음에 달려가 버건디 색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두꺼운 마호가니 색 우리 집 현관문 앞에 서고 싶었지만, 정작 로비 문을 당길 용기는 내지 않기로 했다. 왠지 그 시절의 시간은 지나간 시간으로 흘려보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기로 했다.
“잘 살고 있으면 됐지. 그거면 됐지”. 오랜 벗이 무탈하게 지내는 모습을 본 것처럼, “다행이다”라는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우리 집이 있던 5층 어딘가를 올려다보았다.
건물 코너 상점을 돌자, 이전 집주인이 떠올랐다. 임대차 계약을 앞두고, 그녀는 산책하듯 나를 이끌고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좋은 친구를 소개해 줄 때처럼 상기된 얼굴로 나와 함께 걸었다. 해산물 가게, 맛있는 바게트 집, 과일 가게, 문구점, 디저트 가게, 레스토랑, 슈퍼마다의 특징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블록을 돌았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애정을 담아 안내한 곳은 우리 집 건물 1층에 있는 반찬 가게였다.
그녀 말에 따르면 이곳은 평범한 반찬 가게가 아니었다. 잠봉 대회에서 1위를 했고, ㅇㅇ 반찬과 ㅇㅇ 반찬은 파리 어디에서도 이런 맛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돼지 피로 만든 프랑스식 순대 ‘부당(boudin)’은 부드러운 선지에 특별한 풍미가 있다고 했다. 반찬 하나하나에 세세한 설명과 품평이 이어졌고, 설명의 끝에는 꼭 먹어봐야 할 반찬 목록을 읊었다. 그녀는 이 반찬 가게를 정말로 좋아했고 실로 자랑스러워했다. 당시, 이제 갓 파리에 도착한 이방인은 알아듣기 어려운, 생소한 반찬 이름들에 제대로 귀담을 수 없었지만, 이사를 하고 살아보니 1층 반찬 가게는 그녀 말대로 인기가 아주 많았다. 가게 문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반찬은 금세 동이 났고, 가게 앞에는 긴 줄이 섰다. 나는 토요일마다 돌리는 통닭구이를 사곤 했는데, 그럴 때면 뒤늦게 그녀의 가게에 대한 자부심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네 빵집 ‘르 그르니에’
그녀가 추천한 곳도 좋았지만, 내 마음속 1순위 동네 맛집은 르 그르니에(Le Grenier à Pain : 곡식 창고) 빵집이었다. 새벽 공기도 찬 어슴푸레한 새벽 4시, 맞은편 빵집, ‘르 그르니에’에 불이 켜지면 곧 빵 굽는 냄새가 동네 가득 퍼졌다. 종종 잠에서 깬 나는 큰 창문으로 불 켜진 빵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창을 열어 선득한 공기가 날라온 고소한 빵 냄새를 맡곤 했다. 나는 ‘르 그르니에’가 발산하는 빛을 참 좋아했다.
그 빛을 보면,
‘오늘도 무탈한 하루가 될 거야’
라는 수신호를 보내오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떤 날은 어둠속에서 르 그르니에 상점의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날도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빛을 마주할 때마다, 빛이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번져오는 것이 좋았다. 빛이 안겨주는 포근함이 희망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파리의 빵집은 모든 상점이 늦잠을 자고 있을 때도 바게트를 사려는 사람들로 혼자 분주했다. 저녁에는 무슈들로 긴 줄이 세워졌다. 바게트는 바바리코트를 입은 토박이 중년부터 국경을 넘어온 이방인들까지,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우리 집에 있는 타국의 아이도 앉은 자리에서 바게트 한 개를 뚝딱 해치울 만큼 맛에는 흡입력이 있었다. 특히 갓 구운 바게트에는 진정성이 묻어 있었다.
프랑스에는 바게트 집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동네 빵집 사장님의 아내가 만일 바람이 나서 도망가면, 온 마을 사람들도 함께 시름에 잠긴다는 이야기다. 빵을 주식으로 삼는 마을 사람들에게 바게트는 그들의 존망과 결부되는 일이었기에, 빵집 안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동안 마을의 수심도 함께 깊어갔다. 빵집 부부의 금실이 모두의 관심사가 된다는 사실에 처음엔 공감할 수 없었지만, 몇 년을 머물고 한국으로 돌아갈 즈음엔 나도 이들 무리에 합류한 듯, 빵집의 안위를 신경 쓰게 되었다. 정말로 이곳에서의 바게트는 공공재처럼 물, 공기와도 같았다.
나는 얼른 빵집이 있던 자리를 훑었다. 빵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다만 상호가 바뀌었다. 그 시절의 사장님도, 제빵사도, 친절하고 발랄했던 빨강 머리 언니도, 퉁명스러웠던 아랍 언니도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다. 예전의 그 빵집은 아니다. 그래도 돌아가기 전에 꼭 한번 들러 빵 맛을 보리라고 생각했다.
꽁방시옹가와 샤를 미셸 가가 교차하는 사거리로 나오자, 차도는 전부 주차장이 되었다. 에펠탑으로 이어지는 주변 도로가 주차장으로 변한 지는 이미 한참 돼 보였다. 수많은 차가 향하는 그 끝에는 에펠탑이 있었다. 인파는 점점 늘어가 에펠탑까지의 약 2km에 이르는 거리를 차량과 사람이 꽉 채웠다. 사람들은 정체된 채로 폭죽이 터지는 에펠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슬 같은 반짝임이 에펠 철탑 위에서 일렁이며 크게 터질 때마다 파리지앵과 관광객들은 함께 감탄하며 사라지는 모습도 함께 지켜봤다. 꽉 막힌 도로에서 클랙슨으로 답답함을 호소하던 차량 운전자들도 큰 폭죽이 터질 때면 조용히 에펠 쇼를 감상했다.
알록달록한 폭죽이 에펠 첨탑 주변에서 방사형으로 크게 터진 후 밤하늘을 갈랐다. 아치형으로 쏘아 올린 폭죽은 긴 꼬리가 궤적을 그리다 다시 별똥별처럼 떨어졌다. 떨어지며 흩어지듯 소멸하는 불꽃이 그저 아름다웠다. 샤를 미셸 가에서 보는 에펠탑 불꽃 쇼는 다가갈수록 장관이었다.
에펠탑을 한참 바라보던 내게, 에펠은 마치
"다시 오니 어때?"라고 묻는 듯했다.
나는 "어렵사리 도착했지만, 환대받는 듯 좋아"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