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문의드립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이 도착한 것은 한창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OOOO 프랑스 교민 커뮤니티 사이트를 보고 연락드립니다. 이사 갈 집을 찾는데 조건이 맞아서요. 집 한번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로 시작하는 메일이다. 무려 10여 년 전에 올린 ‘파리 집 공고’에 대한 문의가 지금에서 당도한다. 골동품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편지에 기분이 묘했다. 바다에서 표류하다 조류(潮流)에 쓸려내려 온, 조류(鳥類)가 잔뜩 낀 와인병을 집어 든 후에 병 안에 든 편지를 펼쳐 읽은 기분이랄까? 내게 일어난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쌓인 시간의 궤적을 먼지 털 듯 털어내고 오래전 한국에 귀국했다는 실망 어린 내용의 답장을 했다.
서른 초반의 11년 전, 나는 21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홀로 파리행을 택했다. 프랑스에 가기 전엔 육아휴직을 마치고 한참 서울에서 근무 중이었다. 아부다비에서 일하는 남편은 해외 발령으로 출국한 지 반년이 되었다. 친구 옥이가 하늘나라로 간 지는 1년이 넘었다. 그녀의 부음이 전해진 건 아들 준이가 태어난 지 약 100일쯤이다. 전연 생각지 못한 변사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옥이의 부고는 내가 가졌었던 세상의 빛 일부가 회수되었음을 알리는 전갈처럼 가슴을 크게 쳤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삶은 여전한 듯 흘러갔지만, 죽음이 낸 파열음은 시간이 지나도 잦아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소리가 내 안에서 되풀이되며 점차 더 커져만 갔다. 일상 속의 작은 순간마다 파열음은 끊임없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기억의 한구석에서 울리던 소리는 서서히 스며들어마음에 균열을 남겼다. 균열은 곧 벌어져 구멍이 되었다. 옥이의 죽음은 어느새 타공하듯 하나둘 내 삶을 구멍 내고 있었다. 그 구멍을 피할 수도 메울 수도 없어 그저, 안고 살았다.
멍한 상태로 용광로처럼 뜨거운 감정들이 뒤섞여 들어왔다. “외로웠던 시간을 채워줄 순 없었을까, 막을 수 있던 죽음은 아니었을까?” 낯선 죽음은 무방비 상태인 내게 크고 작은 추억을 껴안고 찾아와, 여러 감정에 사로잡히게 했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까지도 애석함이 일었다. 온갖 사소한 이야기들이 매일 감정의 폭풍 속에서 휘말려 돌고 있었다.
슬픔과 허무, 그리고 끊이지 않는 물음들은 계속해서 나를 찾았다. 삶에 의미와 존재 이유가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뒤엉킨 의문들과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쌓여갔다. 무수한 질문의 화살들이 하루하루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해결할 수 없어 욱여넣고 잠가 두었던 문이 ‘툭’하고 열린 것처럼, 물음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무던히 견디는 일이 첩첩의 태산을 바라보는 일과 같아 세월이 그저 아득해 보였다. 결국 소명 없는 삶이 허무로 귀결되는 인생, 그것이 다인 것만 같은 하루로 매일 매일을 마감했다. 삶에서 길을 잃은 듯했고 대답할 수 없는 시간은 그저 흘러갔다. 그사이 스산한 바람은 휑하게 뚫린 구멍 사이를 오갔다. 가만히 앉아서는 구멍 난 가슴을 매울 재간이 없었다. 내게 없었던 감정을 다루는 일도 어려웠다. 줄곧 해결되지 않았고 삶의 이유 또한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삶은 유한하고, 우리는 한정된 생체시계를 달고 사는 존재’라는 메시지만이 남은 듯했다.
담뿍 젖어 있는 고뇌에서 스스로를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해갈이 되든 안 되든, 정답을 찾을 수 있든 없든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다른 내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옮겨갔다. 어쩌면 새로운 삶 속에서 비감을 떨쳐내고, 내가 알고 싶은 나를 만나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나를 찾는 단서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른 방향으로, 그저 나아가 보자는 실체 없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나는 결국 가만하는 이 삶을 벗어나, 긴 여행길에 나서기로 했다.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는 유목민처럼 아들과 나, 우리 둘 함께. 하지만 어디로…
불현듯 가나의 결혼식(Les Noces de Cana)이 떠올랐다. 일명 스탕달 신드롬이라 불리는 유사 체험을 했던 그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조우했던 명화 ‘가나의 결혼식’ 앞에서 부동의 자세로 서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웅장함 때문이었을까, 외경심 때문이었을까? 루브르에서 가장 큰 명화였던 이 그림 앞에서 내 호흡은 가빠지고 동공은 확장됐다. 자석에 붙은 쇳가루처럼 사람들을 끌어모은 모나리자를 등지고 나는 ‘가나의 결혼식’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자장도 미치지 않고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사라진, 음 소거된 상태로 그 자리에 붙어 서 있었다. 심장은 빠르게 뛰는 경주마의 그것처럼 뛰었다. 숨은 겨우 가는 숨만 내쉬었다. 익히 경험한 적 없는 체험이었다.
그때 나는, 그림 속에서 따뜻함과 풍요 그리고 시끌벅적한 결혼식 뒤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예수의 기적에서 삶의 생명력을 느꼈던 것 같다. 밝은 색채로 가득한 ‘가나의 결혼식’에서, 삶의 다채로움이 묻어나는 그 그림을 다시 보고 싶다. 수많은 등장인물을 생생한 모습으로 다시 마주하고 싶다. 그저 바라보고 싶다. 그때처럼 다시… 그래, 그곳에 가보자. 아무것도 모르지만, 프랑스로 떠나가 보자. 그렇게 정했다.
사직을 하고 친분이 있던 직원들 외에 안면만 있던 분들의 인사가 전해졌다. 60세 정년을 앞둔, 세상을 살아본 선배들의 인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한결같았다. 전화선 너머로 "잘했어. 축하해"라는 축하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전부 설렘이 담겨 있었다.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소년들처럼 희망을 품은 목소리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에 대한 응원 같았다. 그분들의 덕담 덕분인지 축원 때문인지 출발을 준비하며 나는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내 결정이 어쩌면 바람직한 선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도 없었다. 왠지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어쩌면 이 평온은 내가 스스로에게 물어보길 바랐던, 기다려왔던 질문을 던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이든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무모한 판단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아가 보자고 결심했다. 나는 그저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떠났다. 그렇게 누군가의 응원과 걱정의 소리는 지평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메아리처럼 빠르게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