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대로에 파란색 다마스 한 대가 지나간다. 작은 몸집으로 큰 자동차 사이를 비집고 달리는 모습이 기특하다. 고속도로와 도심에서 다마스를 만날 때면, 나는 이 차가 그리 반가울 수 없다. 고개를 돌려 한 번 더 보는 이유는 꺄미와 꺄미의 차, 싹쏘(SAXO)가 생각나서다. 싹쏘는 아침저녁으로 우리를 학교로 실어 날라주던 통학차로, 꺄미와 나는 싹쏘를 타고 함께 꽃학교에 다녔다.
다마스가 싹쏘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오래되고 작기 때문만은 아니다. 두 차 모두, 지금의 차량처럼 전동식 창문이 아닌 수동식 창문 개폐 손잡이를 달고 있다. 꺄미와 나는 창문을 열 때마다 동그란 회색 손잡이를 잡고 ‘돌돌돌’ 열심히 돌려 열었었다. 더운 날 함께 창을 올리며 웃던, 그때의 추억과 향수가 떠오르며 내 눈은 도로 위에서 자꾸 다마스를 쫓는다. 다마스와 싹쏘는 모두 오래전 단종되었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제 몫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
꺄미는 10여 년 전인 2014년, 내가 프랑스 꽃 학교에서 CAP 플로리스트(Certificat d'Aptitude Professionnelle Fleuriste) 과정을 마치고 입학한 BP 플로리스트(Brevet Professionnel Fleuriste) 과정에서 만난 친구다.
입학 첫 주, 반 친구들 모두가 서로 어색한 시기였다. 10명의 학생 중 9명의 프랑스인을 학우로 둔 나는 조금 더 낯설었다. 몇 번의 수업을 거친 후, 우리는 첫 번째 쉬는 시간에 2층 교실에서 야외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와서 둥글게 모여 섰다. 첫 주부터 강행군처럼 진도를 빼는 선생님들의 수업 속도에 짐짓 놀란 우리는 모두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나만 그런 게 아니었음을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여겼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수업과 빡빡한 학사 일정에 대한 걱정들이 낮은 목소리로 오갔다. 대책은 없었지만 서로의 고심을 나눌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통학 얘기로 넘어갔다.
친구들은 대부분 프랑스 각지에서 국내 유학을 온 상태로, 학교 인근 마을에 집을 렌트해 자기 차량으로 통학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주는 큰 결단이었고, 그들의 인생에서도 모험인 것 같았다. 그래 선지, 과정 내내 친구들의 결기는 뜨거웠고, 꽃에 대한 열정은 주변을 녹이듯 쉽게 달아올랐다. 등교 이야기는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외곽에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는 나의 통학 과정을 끝으로, 쉬는 시간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2층 교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던 중, 꺄미가 내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걸었다.
“나도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 괜찮다면 아침에 내 차로 같이 올래?”
말 한번 나눠보지 않은, 겨우 안면만 튼 꺄미가 내게 건넨 말이다. 조용했던 학우의 제안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사정만 듣고, 처음 보는 외국인 친구에게 선뜻 그런 제안을 할 줄은 생각지 못한 나였다. 보통은 “괜찮다”고 대답하는 게 예의일 텐데, 나는 내민 손을 덥석 잡기로 했다.
“고마워.”라는 나의 대답에 꺄미는 해맑게 웃었다.
BP 과정은 이전 CAP 과정보다 훨씬 더 빡빡한 과정의 시작이었다. 단번에 대답을 한 이유는 두 번 묻지 않는 프랑스 문화 때문도 있지만,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 프랑스의 기술 교육 시스템은 매우 엄격했다. 학교에 지각하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고, 매주 치러지는 시험에서 실수를 범해 구멍이 나서도 안되었다. 네 살 아들을 혼자 키우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이 있었고, BP 과정을 앞두고 보이지 않는 다양한 변수들을 생각하면 호의를 거절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내동하던 형식적인 거절도 이제는 루아르강에 던져버리는 것이 옳았다. 얼떨떨하면서도 선물처럼 주어진 고마운 제안에 나는 정말 기뻤다.
꺄미를 잠깐 소개하자면, 금발의 긴 생머리에 밝은 성격을 가진, 흰 피부와 광대 주변으로 주근깨가 살포시 얹어진 차분한 인상의 아가씨였다. 안면만 알고 있던 외국인 친구의 형편만 듣고도 그 자리에서 손을 내밀 수 있는, 심성 고운 아가씨가 바로 꺄미였다.
갓 구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반으로 갈라 나눠 먹듯, 꺄미의 제안은 다음 날 아침 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두 짝의 문 중 우리는 한 좌석씩 나눠 앉았다. 시내에서 외곽으로, 다시 그곳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던 조마조마한 여정은 멈추어지고 긴 동행이 시작됐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7시 30분 동네 교차로에서 만났다. 한적한 길을 달리기에 8시 10분이면 교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꺄미의 선물 같은 제안 덕분에 나는 가을부터 해를 넘기어 이어진 BP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카풀 선물이었다.
그런 꺄미가 세월이 흘러 아이를 낳았다. 금발에 귀여운 주근깨를 가진 소녀 같았던 꺄미가 엄마가 되었다니… 정성스레 준비한 소포를 택배로 보냈지만, 우여곡절 끝에 반송되어 내 두 손에 돌아왔다. 팬데믹 이후 소포 전달 방식에 여러 변화가 생긴 탓이다. 메신저로 안타까운 마음을 주고받던 중, 나는 문득 소포를 다시 보내는 대신 꺄미에게 직접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꺄미를 만나러 프랑스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