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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부시코

by 에코바바

선선한 바람이 부는 파리의 아침, 거리 산책에 나섰다. 주말 오전 8시경에도 사람들은 분주히 거리를 오가고 있다. 통신사 부티크가 문을 여는 10시 전까지는 비교적 호젓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아직 가게 문을 열기 전인 거리에는 여유가 감돈다. 그런 느긋한 분위기 속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한 마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백발의 파마머리를 한 마담은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아침부터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살굿빛 스카프에 흰색 플랫슈즈. 차림새는 소박하지만, 어딘가 품위가 느껴진다. 유유자적하게 앉은 그녀는 이 거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노년의 마담에게서 느껴지는 깊은 평온이 잔잔하게 내 마음에도 닿아 온다.


그녀를 지나, 내 시선은 다시 거리로 향한다. 앞치마를 두른 갈색 셔츠의 비스트로 점원이 내 앞을 빠르게 지나간다. 그는 빨간색 캐노피 아래에서 철제 의자를 하나하나 세팅 중이다. 주말 브런치 손님을 대비하는 활발한 움직임이 무척 능숙해 보인다. 나이프와 포크가 맞닿으며 내는 조그만 마찰음이, 이 아침의 리듬처럼 가볍고 상쾌하다.


조금 더 걸으니 고택 앞으로, 통창을 에두른 현대적인 건축물이 나타났다. 통유리에는 하얀 안내문이 빼곡히 붙어있다. 호기심에 다가가 본 A4 용지 크기의 안내문에는 태극권, 기공, 필라테스, 요가, 연극, 영어로 하는 연극, 과학, 사진, 저널리즘, 체스, 여성복 만들기, 데생, 테크닉 미술, 만화, 합창, 기타, 하모니카, 동요…등이 요일과 함께 쓰여 있다. 알고 보니 이곳은, 다양한 분야의 취미를 배울 수 있는 동네 문화센터다.


“여러 가지가 많네…” 리스트를 읽어 내려가다 시선이 ‘언어’ 분야에서 멈췄다. 영어, 아랍어, 작문…

“어쩜 한국어도 있으려나…?”

점점 기대가 커졌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생겼을 수도 있지 않을까?”

눈이 더 바빠졌다. 중국어, 스페인어…. 일본어…

일본어 다음은…


공백뿐이다.

안내문은 일본어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뭔가 아쉬웠다.

“아직 한국어는 없구나…”


분명 10년 전이라면 조금의 실망도 없던 마음일 텐데…개설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허전하게 다가왔다. 한류에 기대어 내심 품었던 희망은, 괜한 기대였을까.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막연한 좌절감 때문인지 혀끝에 쓴맛이 감돌았다.


“아직 더 시간이 지나야 하는가 보다.” 나는 때아닌 위로를 마음에 건넸다.


넋 놓았던 정신을 잡아챈 건, 코끝에 닿은 달콤한 향기였다. 문화센터 건물 옆 외벽에 만개한 백화등이 바람에 향기를 실어 날리고 있었다. 벽을 따라 하늘 높이 뻗은 백화등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에 놀란 검은 새 두 마리가 무성한 잎들 사이로 황급히 사라졌다. 내가 그들의 고즈넉함을 깨뜨린 모양이다. 새하얀 바람개비 모양으로 피어난 백화등 꽃 주변에는, 호랑가시나무, 라벤더, 찔레꽃들이 이웃해 있었다. 생기 가득한 모습이 정원사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듯 보였다. 나는 덤불을 지나 나무 얼개로 울타리를 두른 부시코 정원에 들어섰다.


밝은 상아색과 라임색으로 물든 목수국, 물싸리, 라벤더, 솔잎 대극이 화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연분홍 장미는 군락을 이루었고, 진초록의 녹음이 짙어진 마로니에 나무들은 위로 쭉쭉 뻗어 있다. 기세가 마치 영원이 지지 않을 듯이 힘차다. 정원 중앙에는 다부진 인상의 여성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야무지게 다문 입술에 시선이 갔다. 이분은 누구시길래 정원의 중앙을 차지한 걸까? 궁금한 마음으로 동상에 다가갔다.



“아… 마담 부시코 구나”


파리 15구의 집을 보러 갔을 때, 전 집주인과의 첫 약속 장소가 부시코 역이었다. 프랑스의 모든 이름이 낯설었지만, 안내받은 역명이 익숙하지 않아 지하철에서 몇 차례 되뇌었던 기억이 있다. “왜 역명이 부시코지? 무슨 뜻일까?” 고개를 갸웃했던 기억도 있다.


집을 보러 간다는 설렘에 부시코 역에서 빠져나와 보았던 그날의 동네 모습은, 시원하게 뻗은 가로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적하고 평온해 보이는 전형적인 주택가의 인상이었다. 발을 내디딘 순간, 뭔가 푸근하고 안온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부시코란 이름은 내게 정주하는 삶의 시작을 열어준, 터를 내어준 보금자리처럼 느껴졌다. ‘파리의 집’을 만나게 해준 부시코 역에서, 나는 늘 ‘안락’과 ’온기’를 느꼈다.


나는 뿌리 내린 파리 15구 집에서, 10호선 지하철을 타고 어학원에 다녔다. 어학원은 봉마쉐 백화점 근처, 세브르 바빌론역(Sèvres–Babylone) 인근에 있었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이 백화점과 자주 마주쳤다.


부시코 부부가 세운 ‘봉마쉐 백화점(Le Bon Marché)’은 세계 최초의 근대 백화점으로, 전 세계 ‘백화점’ 경영의 효시가 되었다. 강매가 성행하던 시절, 봉마쉐 백화점은 고객이 구매 압박을 받지 않고 자유로이 구경하며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소비문화를 창조했다. 상거래의 혁명이었다. 부부는 정찰제, 반품과 환불 제도, 고객 편의 시설, 광고 및 마케팅, 질 좋은 물건, 직원의 서비스 교육 및 복지 등의 개념을 정착시키며 백화점의 기본 개념을 확립했다.


어학원에 다니고, 불어를 조금씩 배우면서 나는 더듬더듬 사전을 뒤졌다. 그렇게 뜻을 하나씩 알아가던 그 무렵, ‘부시코’가 사람 이름이라는 것과 그가 봉마쉐 백화점의 설립자이자 사회 공헌가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봉마쉐 백화점 지하 1층에는 향신료와 식료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대규모 식품관이 있었다. 어학원 수강 과목 중에는 가스트로노미(Gastronomie: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관련된 예술) 미식학 수업이 있었고, 선생님은 이곳을 현장실습처로 삼았다. 야외수업이 있는 날이면, 나는 아침부터 마음이 가벼워져 학교 가는 길이 마치 나들이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유학 초기라 모든 것이 낯선 때에, 현지인에게 가이드를 받으며 도시를 탐험하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어학원에서부터 학생들을 이끌고 백화점까지 걸어왔다. 1층 매장을 함께 둘러보며 설명을 건네고, 지하 식품관에서는 지역별 과자와 특산품을 소개했다. 선생님은 새로운 와인이 나오는 ‘보졸레 누보’ 기간에는 백화점 점원을 섭외해 해포도주에 관한 설명을 직접 들을 수 있도록 주관해 주기도 했다.


가스트로노미 수업은 매주 팀별로 지역별 기후와 특징을 발표하고, 팀이 준비한 치즈, 와인, 과자 같은 특산품을 맛보는 것으로 수업을 마쳤다. 그래서인지 야외수업만큼 교실 수업에서도 수업 집중도가 높았다. 빡빡한 수업에서 유일하게 헐거웠던 수업이어서였을까? 내게는 더없이 즐거운 시간으로 기억된다.


가스트로노미 수업 덕분에 이물 없이 봉마쉐 백화점에 드나들게 되어서인지 통학으로 지나쳐만 가던 백화점이 가깝게 느껴졌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나는 봉마쉐 백화점 식품관에 들러 아들이 좋아하는 피스타치오 마들렌 한 봉지를 사 들고 집으로 가곤 했다. 부시코 역과 봉마쉐 백화점 같은, 그녀의 손길이 닿은 곳을 맴돌며 살았기에, 지금 만나는 마담 부시코가 더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진 걸까. 내 파리 생활의 출발점이었던 작은 역 이름 하나가 우연한 이름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남게 되었다. 마담 부시코의 얼굴은 오늘 처음 보았지만, 묘하게도 그녀와의 인연이 생각보다 깊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돌고 돌아온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당신이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당신의 백화점에서 좋은 기억이 참 많아요. 수업도 할 수 있어서 좋았고요.”


“오늘 아침 정원에서의 산책은 휴식 같은 시간이었어요. 편안하고 고요한 시작을 선물해 주어서 고마워요.”



“그리고 흥정도 젬병인 저 같은 사람에게 정찰제는 정말 필요한 문화였어요. 눈치 보지 않고 백화점을 구경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주신 것도 고맙습니다. “


마담 부시코는 부부가 일군 막대한 부를 병원과 미혼모 시설, 양로원 등을 세우는 데 사용하며 사회에 기여했다. 파리시는 그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8호선 전철역에 그녀의 이름 ‘부시코(Boucicaut)’를 역명으로 붙였고, 15구 부시코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부시코 정원을 만들었다. 지금 부시코 병원은 15구 남쪽의 조르쥬 퐁피두 병원으로 옮겨졌다.


아침 정원은 나와 꿀벌, 새들 만이 전세를 논 듯, 아무도 없다. 고요하다. 누구도 거닐지 않는다. 동상 옆으로 궁둥이만 보이는 벌들이 얼굴이 큰 흰 메꽃에 얼굴을 파묻고 꿀 빨기에 한창이다. 꿀에 전념하는 꿀벌은, 이른 아침부터 이 꽃 저 꽃을 옮겨 다녔는지 궁둥이에 수술 꽃밥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수술 꽃밥 샤워를 마친 꿀벌이 이동할 때마다 내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작은 엔진처럼 아침의 고요를 흔들었다. 나는 만개한 아미초 옆에서 기세 좋은 나무들과 호젓한 시간을 보내다 정원을 살며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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