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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파르나스 역, 파스칼에게로

by 에코바바


파리 몽파르나스 역은 승하차하는 여행객들로 분주했다. 나도 자동개찰기(Composteur)에 들러야 해서 조금 서둘렀다. 기차표에 구멍을 뚫기 위해서다. 떼제베(TGV) 플랫폼 사이사이로, 비둘기들이 승객들과 뒤엉켜 돌아다닌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걷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걸음걸이에는 여전히 호스트를 자처하는 여유로움이 묻어 있다. 파리 비둘기만의 남다른 ‘파리 부심’이 있는 건지, 여유 있게 걷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최근, 서울 지하철에서도 파리 비둘기와 같은 ‘서울 비둘기’를 만나곤 한다. 서울 비둘기에게도 같은 부심이 옮겨온 것인지, 낮 시간 여유롭게 전철을 타는 비둘기를 보고 놀랐던 것도 불과 얼마 전이다.


사람들도, 나도 비둘기를 내버려둔다. 위해를 가하지 않고 피하는 이유는, 어떤 이는 동물을 애호해 보호하려고, 어떤 이는 세균을 옮길까 봐-사실이 아닐지라도-피한다. 또 어떤 이는 무서워서, 혹은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간섭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머리 위로 낮게 날며 손으로 정수리를 감싸게 만드는 ‘배설물의 공포’도 이유 중 하나다. 나 역시 여러 이유로 전철에서 마주치는 비둘기가 달갑지만은 않다. 다만, 머리를 앞뒤로 까딱이며 갈팡질팡 걷는 모습이나 뒤뚱대는 뒷모습은 귀여워서 계속 지켜보게 된다.


기차역 2층 플랫폼 입구에 있던 노란색 자동개찰기는, 도착해 보니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전자 개찰구가 놓였다. 자동개찰기 대신 QR 코드를 찍는 개표구로 모두 전환된 것이다. 덩달아 경조사 봉투만큼 큰 기차표에 구멍을 뚫는 개찰(Compostage) 의무도 사라졌다.




표는 한 번 쓰고 버리기엔 아까울 만큼 잘 만든 기차표였다. A4용지 삼분의 일 넘는 크기에, 두툼한 종이로 만들어져 비효율적이긴 했지만—살굿빛 패턴과 곡선 테두리까지 갖춘, 제법 멋스러운 표였다. 공정이 가미된 모습이, 묘하게 사연 품은 종이처럼 느껴져서 인지 나는 여행이 끝나고도 기차표를 잘 버리지 못했다. 곧바로 구겨 버리기엔, 왠지 빽빽이 써져 있는 글자들이, 줄줄줄 눈물 흘리며 우수수 떨어져 내려올 것만 같았다.


종이 한 장에 너무 많은 일이 담겨 있으니, 나만의 ‘여행 전시품’ 쯤 되는 기차표들을 모았다. 누군가는 그걸 쓰레기라고 하겠지만, 뭐 어떤가—나는 그 쓰레기들로 나만의 여행 박물관을 만들었다. 한껏 서랍에 기차 기록물이 모이면, 여유로운 어느 날, 기차표와 팜플릿들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리고 회상 식을 열었다. 멋도, 맛도, 사연도 담긴 기차표를 바라보며 여행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나만의 전시회를 정리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한꺼번에, 장렬하게 그들을 쓰레기통에 태워 보냈다.


기차표에 구멍을 뚫는 시스템은 꽤 번거로웠다. “바쁜 시대에 표를 뽑아 개찰까지 하고 들어가야 하다니” 효율도 따졌다. 그래도 오늘은, “오랜만에 뚫어 본다!”는 기대로 발걸음을 한 것인데, 경쾌한 ‘드르륵’ 펀치 소리를 못 듣는다고 생각하니, 사라진 것에 궁한 마음이 들었다.


바캉스 기간과 맞물린 대규모 이동에 맞춰 나도 빠르게 이동했다. 마치 열병식에서 발맞춰 걷는 병사들에 휩쓸려 걷는 모양새다. 정신이 없다. 그래도 바캉스 축제장으로 향하는 분위기여선지, 여행객들 틈에 떠밀려 걷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다. 오히려 유쾌했다.


복잡한 인파 속을 빠져나와 어느새 기차에 올라 있었다. 브르타뉴 생브리외(St-Brieuc) 행 기차 2층 칸 좌석에 안착해 조용히 숨을 고른다. 파스칼에게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홀가분한 시선을 창밖에 던졌다. 파리에서 생브리외까지는 약 2시간 30분이다.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은 이미 기관차 맨 앞 량 1번째 좌석에 앉아 있다.




첫 만남


파스칼은 꽃 학교 CAP 과정에서 나와 우정을 나눈 사이다. 막내 이모 벌 되는 친구로 무척 활달한 성격을 지녔다. 파리에서 어학 생활을 한 지 2년쯤 되었을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파리의 꽃 학교가 문을 닫았다는 사실을 알고 급작스레 이사를 하게 됐다. 추운 겨울,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여km 떨어진 ‘앙제’라는 낯선 도시로의 이사는 내게 적잖은 고민이었다. 결국 사전 정보도 없이 별안간 내려와 정신없이 수속을 마치고 처음 만난 학우가 바로 파스칼이었다. 아마빛 머리칼과 하얀 피부를 지닌 그녀는, 온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파스칼 역시 프랑스 북쪽 끝 브르타뉴 지방에서 남쪽 페이드라 루아르의 작은 소도시 부슈멘(Bouchemaine)까지 약 230km 떨어진 곳으로 유학 온 국내 유학생 신분이었다. 세 명의 딸을 뒷바라지하고 다시 시작된 삶이었다. 제2의 삶을 찾아온 그녀의 모습은 자유해 보였다. 그녀의 눈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재사회화로 유예된 행복을 찾는 듯했다. 배우는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였고, 복잡하고 따분하다고 생각되는 이론 수업에서도, 알아가는 기쁨에 매시간 질문을 아끼지 않았다. 수업마다 생기가 넘쳤고 마냥 즐거워했다.


우리가 가까워진 것은 학교 점심시간에서다. 학교는 초원과 고성, 작은 숲만 있는 외딴곳에 있었기에 모든 학생이 급식을 먹었다. 급식은 매달 초 선불을 내고 그룹 식사를 하는 방식이었다. 그때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파스칼이다. 우리 테이블에는 나쓰미와 신 남매, 미야비 일본 친구 세 명과 나 그리고 파스칼, 발레리, 끌로딘이 함께 앉았다. 어쩌다 앉았지만, 동양인들과 프랑스 마담들의 문화 수업 같은 만남이었다. 우리는 과정이 끝날 때까지 이 멤버를 유지했다.


학교 식당은 단 두 사람이 운영했다. 키가 2미터 조금 안 되는 체격 좋은 쉐프 한 분과 검은색머리로 염색한 서버,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항상 레이스 장식이 달린 분홍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규모가 큰 학생 식당에서 쉐프 한 명과 서버가 전통 방식의 코스요리를 서빙한다는 것이 과중해 보였지만, 그들은 빈틈없이 콤비를 이뤘다. 베로니카는 바쁜 탓에 한 번씩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일을 정말 잘했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파스칼과 중년의 학우들은 우리에게 프랑스 요리의 이름과 들어가는 재료를 설명해 주었다. 그녀들은 ‘가스트로노미’ 미식 문화 수업처럼, 설명에 진심이었다. 아쉽게도 미천한 불어 수준이었던 나와 우리 외국인 친구들은, 어려운 프랑스 요리 이름과 재료들을 모두 외울 수는 없었다. 다만, 재료 본연의 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제대로 된 프랑스 가정식 요리를 경험한 값진 시간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슴슴한 아티초크(artichoke)와 샬롯(échalotes) 드레싱 등 먹지 않던 식재료를 맛보고 알아갔다.


프랑스에서는 음식을 남기는 법 없이, 남은 소스조차 빵으로 접시를 닦듯이 싹싹 닦아 먹어야 하는 것이 예의라는 것도 배웠다. 그러나 그 규칙은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었다. 고된 실습 뒤에 먹는 음식은, 더구나 맛있는 음식 앞에선, 지켜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수고란 말이 무색했다. 기쁨의 룰이었다. 눈만 깜박이는 정도의 일이었다. 우리는 천천한 듯 빠르게, 음식을 뚝딱 해치웠다. 누구 하나 어길 일이 없었다. 더구나 학교 급식은 사설 레스토랑만큼 훌륭한 퀄리티를 가져서 모두가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다.




학교 급식의 풍경


학교 급식의 특별함은 메인 식사가 시작된 뒤에 나타났다. 요리에 전념하던 쉐프가 위생모자와 유니폼을 갖추고 주방에서 나와 순시하듯 홀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쉐프는 식사가 한창인 학생들 사이로, 반응을 살피고 음식 맛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이 요리를 만들면서 스스로 신경 쓴 부분을 설명했다. 우리는 입을 오물거리며 그의 일장 연설을 들었다. 발화자와 경청자 모두 진지했다. 쉐프는 학생들의 ‘맛있다’는 칭찬을 한번 더 듣고는 흡족한 표정과 미소로, ‘더 좋은 요리를 하겠다’는 말로 화답했다. 짧은 프리젠테이션으로 요리의 가치와 주안점을 둔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 학교 식당의 풍경이었다.


학생들의 긍정적인 호응이 선순환을 이뤘는지 급식은 맛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과정 내내. 어쩌면 고된 실습 뒤의 식사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음식의 맛은 쉐프의 설명만큼이나 훌륭했다. 쉐프님의 자부심이 곧 음식 자체인 것처럼 단단한 맛이었다. 나는 가끔, 맛있는 음식을 만날 때면 만족스러운 피드백을 받은 뒤 주방으로 향하던 쉐프님의 즐거운 어깨가 떠오르곤 했다.


고된 실습과 빡빡한 이론 수업을 마치고 맞는 점심시간은 모두에게 단비 같았다. 학생 식당에 들어서며 맡아지는 맛있는 냄새는 실습과 시험으로 얼어 있던 학생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요리를 기다리는 순간마저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오늘은 어떤 메뉴가 나올까?’, 지난번 홍합도 맛있었는데.’와 같은 작은 행복의 기대감이었다.


실습 동안 금기였던 대화는 학교 식당에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우리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의 숨도 돌릴 수 있었다. 시원하고 청량한, 느슨해진 공기 속에서 한 끼, 두 끼가 모여 서로를 챙기는 사이가 되어갔다. 그 시간이 쌓여 우리를 가깝다고 느끼게도 했다. 단순히 ‘점심을 먹는다’의 의미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파스칼과 친해지면서, 그녀는 들을 때마다 답답했던 내 F 발음을, 아랫입술을 물어가며 발음교정을 해 주었다. 다른 외국인 친구들이 수업을 잘 따라오는지 중간중간 살피며, 궁금한 점이 있으면 대신 물어봐 주기도 했다. 빡빡한 학사 일정 중에 얻은 짧은 노동절 휴가 동안, 파스칼은 식사 멤버 몇 명을 브르타뉴 고향 집으로 초대했고, 그의 별장에서 며칠을 보내고 온 우리는 바캉스 후 더욱 가까워졌다.


기차가 브르타뉴 생브리외(St-Brieuc) 플랫폼으로 천천히 들어서고 있다. 곧 파스칼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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