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 작은 미술관 - 오감만족 우리 동네 미술관
전시의 시작에서 이 한 문장을 읽으며 애니미즘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모두 동원해 작품의 영혼과 생명력을 느끼며 공간으로 발을 내딛는다.
마음속 다짐과 함께 처음으로 마주한 존재, <큰 덩어리, 2020>는 무엇인가를 가득 채워 있는 대로 자신의 엉덩이를 부풀렸다. 인간을 위해 늘 희생하던 납작하지만 적당히 폭신한 느낌의 엉덩이는 사라지고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모습이 한편으론 귀엽기도 하다. 이렇게 새롭게 자라난 공간은 직관적으로 보기에 아주 가벼운 기체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문득 대학시절 입사를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던 때가 생각났다. 실제의 나보다 부풀려 과장되게 쓰인 자소서는 선택받기 위한 몸무림의 극치였다. 그래서일까, 다시 바라본 <큰 덩어리, 2020>에는 어딘가 애잔함이 묻어있다. 마치 '이렇게 포근하고 폭신한데 앉지 않을 거야?'라고 말을 거는 것만 같다. 마지막으로 '얘, 그렇게 애쓰지 마'라는 한 마디를 건네며 다음 작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선가 수집되어온 전통가구 스타일의 문갑이 달려있는 탁자는 아주 꿈이 많았던 것 같다. 집주인이 사라지길 기다렸다는 듯, 비어있는 단을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길고 높게 무언가를 뻗어 올리고 있다. <솟아오르다>라는 이름처럼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도상의 한 지점, 우리가 보는 지금의 이 모습은 사실 아주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탁자의 꿈은 어디까지 자라날 것인가? 탁자는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흰 내가 꿈도 없는 줄 알았지?"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다양한 방향으로 진화하는 이 가구들이 어쩌면 동시대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짙어진다. 스스로의 뛰어남을 강조해 좁아진 그 자리에 계속 남거나 혹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의 진화를 거듭하는 가구들은, 4차 산업혁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노동환경이 변화하며 사라질 위기에 놓인 직업군의 사람들의 선택과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몇 걸음을 옮겨 숨을 가득 채워 자신을 부풀린 거울 <흐려진, 2020> 앞에 선다.
나를 비추는 도구로서의 거울은 이제 더 이상 과거만큼 사랑받지 못한다. 대신 수많은 셀피 카메라(어플)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모두들 그 속의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흐려진, 2020>은 조작되고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을 사랑할수록 실존하는 자신이 흐려지는 현실을 반영한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의 현실에서는 스스로의 적나라한 민낯을 보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을 비춰온 거울은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빛나는 혜안을 가지고 진화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전시의 마지막,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매트리스와 마주하게 된다 <자라나는 매트리스, 2020>. 모든 것이 가벼워지고 미니멀 해지는 지금, 채우고 부풀려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오히려 퇴화에 가까운 양상인 듯 보인다. 매트리스는 이제 몸을 누이는 보금자리가 아닌 다른 기능을 하고 싶은 것일까? 순간 저 위에 누워있을 자신을 상상해 보니 본래는 죄수들의 고문 기계로서의 역할이었던 러닝머신이 떠올랐다.
이번 전시를 구상한 STUDIO 1750의 김영현, 손진희 작가는 5년 전 프랑스 레지던시에서의 작업이 현 작업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곳은 과거에 프랑스 전자회사의 대리점이 있던 곳이었다. 그 주변으로 버려진 가구와 가전이 쌓여있던 한 장소에서 가구의 일부를 수집하여 만든 오브제 작품으로 시작된 작업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오브제들은 현존하고 있지만 작가의 과거와 앞으로 이어질 미래의 작업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래서 마치 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을 떠오르게 하는 묘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앞에 서면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이 이름 없는 사물들은 동시대 우리의 자화상과도 같은 느낌이 들어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그 작은 소리에 하나씩 응답하다 보면 어쩌면 지금의 나와 시대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전시장을 빠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