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마 전 미술 전공자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다. 한 참 각자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상대방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다 똑같이 고양이를 그리잖아요. 소재에 특별한 점이 없어요. 남들이랑 다른 걸 그려야지."
그 말의 어조에는 부정적인 관점이 담겨있었다. 나 또한 동물을 그리고 있는 사람으로서 섣불리 반대나 찬성의 입장에서 말하기가 어려워 그냥 마음에 그 문장들을 담아두기만 했다. 그리고 가끔 그림을 그릴 때면 문득문득 그 말이 떠올라 내 주위를 둥둥 떠다녔다.
"다들 똑같이 고양이를 그리잖아요, 다들 똑같이 고양이를 그리잖아요, 다들 똑같이 고양이를 그리잖아요"
한동안 이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심지어 "넌 왜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고양이만 그리니?"라는 왜곡된 환청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그 한 문장의 대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어느 날 아침, 문득 이것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어 졌다.
가장 먼저 직관적으로 떠오른 질문은 "왜 고양이를 그릴까?" 하는 것이었다. 문득 작업실에 걸려있는 르느와르의 그림 한 점이 떠올랐다. 제법 능숙하게 고양이를 안고 있는 여인과 그것이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의 줄무늬를 가진 고양이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나는 그 그림을 한동안 떠올려 보았다. 시선이 여인에게서 고양이에게로 이동하자 이네 만면에 미소가 지어졌다. 조금 단단해져 있던 마음도 무장해제가 되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한 단어를 떠올렸다. 위로. 그것은 매력적임, 귀여움, 사랑스러움 등 다양한 언어들로 표현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위로'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력적인 위로, 귀여운 위로, 사랑스러운 위로처럼 말이다. 그리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고양이가 우리에게 전하는 위로는 변함없지만, 지금의 우리가 더욱 고양이에게 열광하는 것은 더욱 열렬히 위로받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하게 되었다.
언젠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허지웅 작가가 한 TV 프로그램에 나왔는데 꼭 너처럼 고양이 동영상으로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더라"라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내 기억으로 허지웅 작가의 혈액암 완치 후 첫 방송이었던 것 같다. 나의 첫 시작도 그러했다. 몸이 좋지 않아 한동안 밖으로 나갈 수 없었을때, 나는 그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나는 한결같이 하루의 마무리를 고양이 동영상으로 했고, 어느 시점부터는 First Reflection 이란 타이틀의 연작을 그리게 되었다. 그것은 고양이나 강아지가 처음으로 거울의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는 순간을 그린 그림들이었다. 요즘은 연작 그리기를 잠시 멈추고 있지만 가끔 그 그림들을 꺼내볼 때면 아직도 그 녀석들의 귀여움에 몸서리친다.
그러다 나는 결국, 고양이의 집사가 되었다. 아이의 이름은 니체로 지었다. 다른 형제자매들과 다르게 니체만은 이름 짓기가 아주 어려워 몇 날 며칠을 노트에 적어가며 고민했었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이 기쁘면서 한편으로 슬프기도 했지만 그 아이에게 니체란 이름을 준 것에 지금은 매우 만족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철학자이자 고양이의 이름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부르고 있다. 고양이 니체에게 받은 큰 위로를 더 크게 돌려주고 싶어 언젠가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싶다. 만약 그녀를 그리게 된다면 파울 클레의 '고양이와 새'와 같은 느낌으로 그려보고 싶다. 누구나 보는 니체의 겉모습 말고 나만이 볼 수 있는 그녀의 느낌으로 말이다.
우리는 바야흐로 고양이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한 시대의 그림들은 언제나 그랬듯 각각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 고양이의 시대, 고양이를 그려야만 하는 시대라면 그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예술의 방향이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움과 창의성에만 목매지 않는 것처럼 유행에 따라 시대를 위로하는 더 많은 고양이가 나타나길 나는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