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부르다
어제까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따뜻하고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 어제의 습도와 오늘의 투명함을 머금은 봄꽃들을 만나러 나는 길을 나섰다.
가벼운 그 길에서 처음으로 만난 아이는 '흰 제비꽃'이었다. 기다란 잎은 곡선을 그리며 땅을 바라보고, 흰꽃은 하늘을 향에 목을 있는 대로 뻗어 힘을 주고 있었다. 흰 제비꽃의 학명은 Viola patrinii이다. 학명이란 학자들이 식물을 특징에 따라 분류하고 붙여놓은 라틴어로 된 이름이다. 그런데 흰 제비꽃을 구성하는 학명 중, 앞에 있는 Viola는 라틴어로 '보라색'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제비꽃 하면 보라색을 떠올릴 것도 같은데 국제적으로도 제비꽃의 대표색은 누가 뭐래도 보라색인가 보다.
쭈그리고 있던 다리를 펴 좀 더 위쪽을 올려다보니 애기똥풀이 귀엽게 피어있었다. 이름이 애기똥풀이라서 나는 자꾸 이 아이를 정말 '애기'처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 이름의 중심은 '애기'보다는 '똥'에 있는대도 말이다. 애기똥풀은 줄기나 잎을 자르면 아주 선명하고 진한 노란색의 액이 나온다. 아마 과거의 사람들은 이걸 가지고 '애기똥'같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리저리 시선을 주다가 탐스러운 아이와 마주쳤다. 맛있지 않고서 꽃보다 더 사랑받는 씨앗을 가진 식물, 민들레이다. 서양민들레는 나무에서 떨어진 동백꽃까지 품고 결실을 맺은 후 이제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보통 우리가 많이 보는 민들레는 서양민들레이다. 토종은 아니지만 '서양'자가 붙은 이 아이도 우리 땅에 발붙인 지 100년이 넘었다. 그러니 서양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은 이제 좀 지워줘도 될 것 같다.
다음 만난 아이는 가파른 나무계단 한쪽에 자리 잡고 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멀리서 보고는 '냉이구나'하며 사진을 찍었는데,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니 흔히 알던 냉이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알던 냉이는 하트 모양의 종자를 맺는 아이였는데 사진 속에는 줄기를 따라 길쭉한 모양의 종자가 맺혀있었다. 궁금해서 도감을 찾아보니 '황새냉이'와 닮아있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이름이 '황새냉이'라고 장담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양지바른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며 나는 봄에만 잠깐 만날 수 있는 아이들과 눈 맞춤을 이어갔다. 산괴불주머니, 개불알풀, 양지꽃, 광대나물, 현호색, 살갈퀴. 반가운 얼굴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대학교 때 개불알풀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듣기만 하고 그 이름을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건 개불알풀이고 이름이 그런 이유는 이 식물의 종자가 마치 개의 불알처럼 생겼기 때문이죠.'라고 말한다.
나는 이렇게 산책을 하다가 가끔 지나가던 무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오늘도 할머니 한 분이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향해 '이건 달맞이꽃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애기똥풀 같은데요'라고 대답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이렇게 물어볼 때면 정확히 '그건 애기똥풀이에요'라고는 대답하지 않는 편이다. 이름만 모를 뿐이지 나의 세대보단 훨씬 자연과 가까운 분들이기 때문에 대답하는 말의 분위기가 그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또 가끔 마주치는 두 사람이 있다. 엄마와 아이이다. 이제 막 걸음에 익숙해진 아이들에게
"이건 '꽃'이야, 이건 '풀'이야, 이건 '나뭇잎'이야."
라고 열심히 설명해주는 어머니들을 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말을 따라 해 본다.
"이건 '애기똥풀'이야, 이건'냉이 풀'이야, 이건'벚나무 잎'이야. 이 아이들도 다 이름이 있어. 우리 다음에 만나면 이름을 불러주자."
이 봄, 나는 많은 봄 꽃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언젠가는 누군가와 함께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봄바람이 살랑, 마음에도 살랑 거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