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도 소설이 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단 하루, 단 하루로 책을 썼다?!
'설마, 단 하루겠어?'
두껍진 않지만 그렇다고 무척 얇지도 않은 책 한 권이었다. 성인이 되고부터는 이상하게 소설에 손이 잘 가질 않는다. 그래서 선뜻 고르기도 쉽지 않고 뭘 읽을까도 늘 고민거리였다. 가끔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이 될 때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편인데 거기서 추천된 책이길래 혹시나 하고 읽어보았는데 읽어보길 참 잘한 듯하다. 책을 선택한 이유에는 작가도 있었지만, 단 하루 동안 수용소에서의 삶을 그린 책이라는 말에 끌렸다. 단 하루? 설마! 더 긴 시간이겠지 싶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난 지금, 단 하루 그의 삶이 내 삶 속으로 내 글 속으로 스며든다. 멋진 글 쓰기의 표본이요 멋진 전개다.
<시작> 여느 때처럼 아침 다섯 시가 되자, 기상을 알리는 신호 소리가 들려온다. 본부 건물에 있는 레일을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다. 손가락 두 마디만큼이나 성에가 낀 유리창을 통해 단속적인 음향이 희미하게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날씨가 춥다 보니 간수가 오랫동안 두드리고 있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끝>
번역도 좋았다. 글을 읽어 내려감에 있어서 끊김이 없는 번역이어서 소설에 푹 빠질 수 있었다. 걸어가면서도 읽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진정한 문학소녀였던 한 친구는 번역서의 완벽한 이해를 위해 출간된 모든 번역 서적을 다 사서 본다고 했다. 예를 들어, <짜라투르스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몇 권의 동일한 책 (번역가가 다른 책들)을 사서 읽는다고 했다.
언제나 번역 서적을 고를 때면 그녀의 책 고르는 방식이 무의식에서 떠오른다. 난 그렇게 읽는 편은 아니지만 왜 그녀가 그렇게 번역에 민감했을까가 이해가 된다. 가끔 오래된 고전들은 특히 번역이 참 답답할 때가 있다. 물론 요즘 번역서도 마찬가지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면 그 문단은 거의 건너뛰는 경우가 많다. 아쉽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원서를 찾아 읽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번역가도 작가만큼 글의 이해도가 높아야겠구나 싶다. 번역 잘하기는 글쓰기만큼 어려운 작업 이리라. 글들의 노고와 수고에 감사하면서도 좀 더 좋은 번역을 욕심 내는 것이 독자의 욕심이지 않을까?
내가 고른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한 권의 번역서로도 솔제니친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덕분에 참 행복했다. 글을 읽는 내내.
오래간만에 소설이 참 좋았다. 이런 멋진 글쓰기를 나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좋았다. 일상의 짧은 순간도 길게 글로 옮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필사가 좋은 글쓰기의 한 방법이듯 비슷하게 모방해 보는 것도 글쓰기에 참 좋은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솔제니친을 통해 나도 멋진 작가가 되어 보고 싶다는 잠깐의 욕망에 젖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