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태 복원기(10) : 자존감 지키기
초보 꼰대답게 사극을 좋아하는 나는
‘대조영’, ‘왕건’, ‘무인시대’ 등등의
칼 쓰는 사극을 아마 10번도 더 봤고,
사실 현재도 보고 또 본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 고려 이전의 역사는
랩으로도 읊조릴 수 있을 지경이다.
그런데, 그렇게 재미지게 사극을 보면서도
유독 내 눈에 거슬리는 장면들이 있다.
남들은 불화살이 오가며 성벽을 오르는 적에 분노할 때,
나는 조용히 리모컨을 들어 화면을 정지시킨다.
주인공의 발치, 화사하게 피어난 하얀 꽃무리를 향해
돋보기를 들이대듯 눈을 가늘게 뜬다.
30년 차 생태학자의 고질적인 직업병,
이른바 '생태적 검열'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드라마 속 두 연인이 산천초목을 병풍 삼아
'풍류 밀회'를 즐기고 있다.
애틋한 눈빛이 오가고, 카메라는
그들의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주변의 꽃들을 서정적으로 훑는다.
그때 내 눈에 걸려든 불청객이 있다.
일명 계란꽃이라고 부르는 '망초'다.
망초가 누구인가. 이름부터가
'나라가 망할 때 들어온 풀'이라 해서
붙여진 녀석들 아닌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경인선 철도 건설에 쓰기 위해 들여온
침목에 묻어 건너온 이 귀화식물은
철길을 따라 우리나라에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 녀석이 타임머신이라도 탔는지,
수백~수천 년 전 고려와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한복판에
떡하니 주연급으로 출연 중이다.
내 눈에는 그 장면이 마치 스마트폰을 한 손에 든
이순신 장군이나,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행차하는
영조 임금을 보는 것처럼 기괴하다.
"저기요, 감독님! 저 꽃은 아직 입국 심사도
안 마친 녀석이라니까요!"
속으로 외쳐본들 소용없다.
화면 속 연인은 망초 꽃밭에 앉아
"천년만년 변치 말자"며 사랑을 속삭인다.
남들은 꽃길이라 부르는 그 길이 내게는
'시대적 불시착'의 현장이 되고,
아름다운 밀어는 생태적 오류에 묻혀 소음이 된다.
로맨틱해야 할 '초야의 상봉'이 졸지에
'외래종 유입 실태조사' 현장으로 변하는 순간,
나는 이 몹쓸 직업병을 실감하며
허탈하게 웃고 만다.
선생님인 친구들은 이모님들에게
연신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고,
개인택시를 운전하는 친구는
자율주행차는 완성될 수 없다며 냉각수 없이
오버히트된 엔진룸 마냥 연기를 피우며 거품을 문다.
잠시 고개를 돌려 보면
호프집 사장이던 친구는 닭 한 마리를
자기 앞에 놓고 연신 맥주 리필에 집중하다가
계산할 땐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다.
어디 이뿐이랴.
크던 작던 사업을 하는 친구들은
2차는 본인 계산이라는 임무를 띠고
술잔을 칼치기로 방어하고 있고,
음대 교수 친구는 절대 노래방을 갈 수 없다며
오페라를 부르고 있다.
일주일에 몇 번 안 보는 T.V를 보면서도,
몇 달에 한 번 모이는 모임에서조차도
쉼 없이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마치 작전계획 5027에 따라
성실히 경계태세와 임무수행에 충실하기 바쁘다.
어쩌면 우리는 직업병을 핑계로
긴장을 놓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열심히 살아온 흔적이고,
그렇게 길들여진 ‘나’를 확인하며
살아내기를 하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그래서 친구들이 내 공황 이야기를 안 들어주고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치 않다.
일상에서 직업병이 나타난다는 것은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이고,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자존감일 수 있다.
언제 보아도 자신보다 큰 짐을 지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나,
하늘이 겹치는 호숫가에서
언뜻 유유자적해 보이는 오리도
물속에선 연신 물갈퀴의 성능을 확인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쉼’이란
어색한 숙제일 수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말자.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소리 없이
안정의 극상으로 향하는 숲의 천이처럼,
이제부터라도 이기성을 찾아
조금 덜 열심히 살아보자.
그래 그거면 된다.
응, 여기까지 잘 왔다.
이번화를 마무리로 하여 저의 첫 번째 브런치북
'응, 여기까지 잘 왔어 1부'를 마치려 합니다.
부족한 제 글을 읽어 주시고
감사의 라이킷, 감동적인 댓글에
눈물의 감사를 드립니다.
토요일(3월 14일)
1부를 마치는 소감과 더불어
간단히 2부에 대한 소개를 하고
2부의 프롤로그는 별도로 공개 하겠습니다.
성낙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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