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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떠오름 #2. 향(香)을 취미로 가질 때

by 신상우

손가락 마디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이 향(香)이 베르가못인가. 발효된 꽃향 같기도 하고. 뒤에는 약간의 시트러스가 있다. 좋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 향이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문득 내가 언제부터 이런 향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마 성수동에서 먹었던 그 커피를 마시고 난 뒤부터일 것이다. 번잡한 성수동 거리의 정반대 편, 자동차 정비소들이 모여있는 거리에 있던 카페였다. 커피를 잘 모르던 때였기에 비싼 커피가 맛있다고 생각했다. 제일 가격이 높은 필터 커피를 주문했다. 바로 이 선택이었다. 단순하지만 아주 치명적이었던 이 선택 덕분에 내 삶은 확장되었다. 새로운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이전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향을 좋아하게 되면 취미가 고급이 된다. 인간이 구별할 수 있는 향의 종류는 수 만 가지가 되는데, 향을 탐구하면 할수록 그 깊이가 무한으로 향하는 것을 실감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향이 생기고 나니 그 향만 찾게 되고 그럴수록 돈이 점점 많이 나가기 시작한다. 그 향만큼 좋거나 더 좋은 것만 찾을 뿐 그보다 좋지 않은 것은 코와 입에 대지도 않는다. 꼴에 비싼 녀석이 되었다.

KakaoTalk_20251125_193925800.jpg 성수 기미사

나는 커피에서 꽃향이 나는 걸 좋아한다. 거기에 약간의 산미와 시트러스 혹은 베리의 향긋함이 더해진다면 더욱 좋다. 다크, 견과류 등의 고소하고 묵직한 향들은 내 취향이 아니다. 때로는 그런 향들이 매일 마시기에 부담이 없다고 느끼긴 하지만 나는 커피를 매일 마시지 않기 때문에 (카페인에 매우 취약한 DNA를 가지고 있다) 가끔가다 마시는 커피가 내 영혼을 산뜻하게 고양시켜주기를 바란다. 꽃향이 나는 커피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파나마 게이샤 내추럴이다. 산뜻하면서도 발효된 듯한 꽃향이 압도적인 원두인데 어디에서 마셔도 기본적으로 고급진 꽃향을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압권이었던 곳은 앞서 이야기한 카페인 성수동에 있는 ‘기미사’라는 곳의 파나마 게이샤 드립커피다. 그 고급진 향은 지금 떠올려도 기가 막히다. 입 안에서 꽃의 정원이 펼쳐지는 그 풍부함은 입으로 코로 수 번을 느껴도 기분이 좋다. 파나마 게이샤 다음으로 좋아하는 원두는 에티오피아 쪽 원두다. 정확한 품종이나 농장, 발효 방법은 잘 모르지만 신기하게 에티오피아 원두를 드립커피로 마실 때면 베리류의 향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고 말로 형용하기 매우 어려운 그 오묘한 향이 있는데 그 향을 매우 좋아한다. 파나마 게이샤가 가끔 가다 마시는 고급진 취미라면 에티오피아는 일주일에 몇 번 정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취미라 말하겠다.

KakaoTalk_20251125_193630261.jpg 아흐부아 뿌비응


커피의 향을 탐독하기 시작한 뒤로 와인, 위스키, 청주 등의 주류 쪽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종종 마시긴 했지만 향과 맛을 느끼기보단 취하고 싶어서 분위기를 내고 싶어서 마셨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술에도 내가 좋아하는 명확한 향과 맛이 있다. 레드 와인은 목 넘김이 부드럽고 적당한 탄닌감이 있으며 삼켰을 때 혀 끝에 잔잔한 단맛이 맺혀있는 것을 선호한다. 품종으로는 까쇼를 좋아하고 와인으로는 신퀀타(Cinquanta)를 맛있게 마셨다. 화이트 와인은 좀 더 명확한데 오키, 위스키 향이 느껴지는 드라이한 와인을 좋아한다. 품종으로는 샤도네를 좋아하고 와인으로는 버터앤브레드(Butter&Bread), 아흐부아 뿌비응(Arbois Pupillin, Domaine desire petit)을 맛있게 마셨다.


위스키와 청주는 아직 탐구 중인 영역으로 명확한 선호는 없다. 다만 처음 마셔본 위스키가 글렌피딕 12년 산이었기에 이 싱글몰트 위스키가 내 위스키 맛의 기준점이 되었다. 위스키의 맛과 향을 음미할 때, 글렌피딕 12년과 밸런스가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는 식으로 평가한다. 지금까지 마셨던 위스키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달위니 15년으로 목 넘김이 부드럽고 뒤에 은은한 꿀향이 난다. 가장 충격적인 위스키는 아드벡인데, 흙을 입안에 쑤셔 박는 듯한 그 향은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스피노자가 말했다."고통은 필연이고 괴로움은 선택이다"

그는 인간 삶의 기본 조건이 고통이라 생각했다.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 인간 삶은 고통을 경험하고 그것에 좌절하고 방황하고 울부짖고 싸우고 이겨내고 찰나의 순간 환희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 연속된 과정을 통해 인간은 성장한다. 고통이 기본값인 건 알고 있지만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는 한계가 있다. 소설『모순』(양귀자)의 주인공 안진진이 적당한 분량의 불행과 적당한 분량의 행복을 바랬던 것처럼 우리는 고통을 느끼면 그 만한 양의 행복도 동시에 갈망한다. 여기서 내가 향을 즐기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고통이 괴로움으로 가지 않도록 나에게 주는 잠깐의 휴식, 찰나의 행복. 그것이 내가 향을 즐기는 이유다.


"고통아 지금은 아냐. 조금만 이따 와. 이따 오면 제대로 놀아줄게.

지금은 나 좀 즐기고 싶어.

나 방금 커피 내렸단 말이야.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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