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할 일을 마친 아이에게 해준 말
2학기 개학하고 거의 한 달이 지나간다. 봄에도 그렇고 가을에도 그렇고 학기 초에는 아이들이 바짝 긴장을 하고 새 학기를 시작하기에 아픈 아이들이 덜 하다. 그러다가 한 달이 지나면 하나 둘 감기 걸렸다, 열이 난다, 장이 탈 났다 등등의 소리가 들려온다. 긴장이 풀리니 열심히 생활하던 몸에서 쉬어가라는 신호를 주는 것이다. 십여 년 교직에 있으면서 현장에서 체득한 감이다.
학교 아이들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가 들리더니, 어제는 첫째 아이가 유난히 피곤해했다. 12살 체력을 위해 한 달 전부터 복싱을 시작했고 열심히 수련해서 어깨도 펴지고 자세도 참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몸에 붙였나 보다. 복싱 끝나고 퇴근하는 아빠 차 타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는데, 차 타고 오는 중에 잠까지 들었단다. 2학기 적응도 적응이요, 복싱도 익숙해지며 한 차례 근육이 적응할 단계인 모양이다. 지친 몸으로 돌아와 저녁밥을 달게 먹고 잠시 혼자만의 자유시간을 가졌다.
5학년인 아들은 학교공부도 6교시까지 있고, 작은 학교라 스쿨버스 기다리는 동안 방과 후 수업도 매일 하나씩 3개를 한다. 곧바로 마지마 스쿨버스 타고 나와 복싱 수련 1시간을 하고 집에 오는 루틴이다. 방과 후 수업이 없는 요일과 복싱장에 가지 않는 요일을 모아 하루 이틀 정도 오후에 자유시간을 가진다. 그 외에는 복싱까지 하고 저녁을 먹은 다음에야 자유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아이가 배우고 싶은 것과 배워야 할 것들 사이에 자유시간을 적절히 잘 배치하는 몫은 아이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부모의 역할이다. 과하다 싶으면 줄이고, 또 필요하다 싶으면 아이와 의논한 다음에 시작하곤 했다. 첫째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대한 의욕이 큰 편이라 최근에는 '보컬'이 배우고 싶다고 애원을 해왔다. 여름방학 때 군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청소년 문화의 집에서 일대일 보컬레슨을 받은 결과였다. 그 시간이 너무 좋았고 행복했었던지 쭉 이어서 보컬을 배우고 싶다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야기를 했고, 결국 아이가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든 지원해 주고픈 마음에 고민하다가 쌈짓돈 풀어 레슨을 등록했다. 고로 일주일 중 하루는 보컬 수업을 또 들으러 가야 하는 셈.
아이가 차에서 잠들어 오는 것을 본 남편은 마음이 짠했나 보다. 아이가 하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니냐, 더 줄이면 좋겠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학교 방과 후도 피곤하다면 안 하면 좋겠단다. '아이고, 보컬까지 더 하겠다는 아이인데 여기서 뭘 더 줄일 수 있을까?' 속으로만 말하면서, 아빠가 그래도 걱정해서 그런 거니 아이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학교 방과 후 중에 그만하고 싶은 것 있니? 없단다. 피아노를 그만둘래? 아니란다. 줌으로 하는 영어시간을 줄일래? 그것도 아니란다. 수학 문제집으로 복습 한 두 페이지하는 것도 해야겠단다. 복싱도 자기한테 꼭 필요한다고 한다. 음...
저녁 시간에 피아노 연습, 영어 복습, 수학 복습 하면 소요되는 시간은 1시간 정도이다. 사실 아이의 체력과 열정을 봤을 때 그 정도는 루틴으로 가져가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든다. 서울 어느 매에는 새벽부터 자정까지 달리는 청소년도 많다던데, 그것까지 지향하는 건 아니지만 적정한 양의 배움들은 필요하다. 지금 시기가 딱 아이들이 피곤함을 많이 느끼고 힘들어할 때라 유난히 피곤해한 것 같다는 결론. 그래 할 것은 하자.
세상사 힘들다고 안 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 이번 주에 우리 반 아이도 수학 문제집을 펴자마자 마자 "선생님 힘들어요"라고 했다. "OO아, 힘들지? 힘든 건 당연한 거야.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모르던 것을 배우려면 당연히 힘이 들어. 그런데 그 정도의 '힘'은 내야 자랄 수 있단다. 우리 오늘도 힘 한번 내볼까?" 아이와 두 손을 모아 "아자 아자 파이팅!"을 외치며 에너지의 흐름을 바꿔봤다. 아이는 힘내서 그날의 과제를 다 풀었다. 다 해낸 아이에게 칭찬을 해주었다.
식사 잘 마친 아이는 혼자만의 자유시간 자기 루틴대로 빈둥빈둥 한 시간을 놀다가, 8시부터 그날 해야 할 것들을 했다. 아빠의 짠한 눈빛과 엄마의 고민하는 마음이 전해졌던지 조금씩 투덜거렸다. 몸이 어제 따라 더 피곤했던 건 확실했고. 그래도 이미 약속한 선까지는 다 해보자 살살 다독이며 완주하도록 도왔다.
"우리 아들, 오늘도 끝까지 해냈구나"
할 일을 다 한 후에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을 맛있게 읽고 잠자리에 드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해주었다. 내 아이지만 진심으로 대단하다 싶었다. 기꺼이 하는 날도 있고 힘겨워하는 날도 있을 테지만, 완주했다는 뿌듯함을 아이가 느끼면 좋겠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익혀나가는 태도는 100점보다 더 중요하니까. 엄마의 위로와 응원을 듬뿍 받은 아이는 집이 세상에서 제일 편하다고 말하며 세상 무사한 표정으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