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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Jul 03. 2016

40대를 위해 다시 쓰는 유전학

다시 주목받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나는 한 때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을 공부하면 이 분야를 나의 평생의 업으로 삼을까라는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을 읽으며 나만의 공룡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생겨났다. 하지만 다른 과학분야를 직업으로 택한 후부터 분자생물학 공부는 멈췄었다. 그 이후에도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최신의 논문을 이해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걸 느끼며 관심마저 멀어졌다.


내가 분자생물학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중심이론(Central Dogma)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을 때였다. 일부 바이러스에서 RNA 유전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DNA는 생명체의 형태뿐만 아니라 개체의 행동과 성격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굳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리차드 도킨슨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등장하기 전이었지만 유전자 중심주의는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생물학 시험에서 틀린 답을 고를 때면 "획득형질은 유전한다"를 골라야만 했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은 틀린 것이다, 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전지전능한 유전자를 경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과학자의 길로 접어드는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렇지만, 이런 유전자 중심주의에 완전히 동의하기엔 뭔가 뒷맛이 남았다. 용불용설이 틀렸다면 진화는 환경변화에 유리한 돌연변이가 등장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인가? 돌연변이가 그렇게 자주, 기가 막힌 때에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정답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고는 시간이 흘러갔다. 분자생물학을 손에서 놓은 지 20년이 지나갔다. 나의 지식은 여전히 그때 그 시절에 머물고 있었다.


왕갈비, 다시 유전학을 일깨우다.


선후배들이 수원의 갈빗집에 모였다. 매출액이 중소기업 수준을 능가한다는 기업형 갈빗집이었다. 막걸리 발효에 사용하는 균주에 대해 새로운 종인지 아니면 단지 배수체의 유전자를 가진 특이한 녀석인지를 논하는 자리였다. 뭐~ 그런 이야기를 갈빗집에서 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저녁에 만나서 토론하기가 그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오랜만에 성공한 선배가 사겠다는데 이때는 가주는 게 예의 아닐까.


그런데 이런! 대화의 수준을 점점 더 따라가기가 어려워졌다. 후생유전학이라는 분야로 주제가 옮겨가면서부터였다. 이 용어를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확히 그 의미를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 자리에서 생각했다. 나처럼 용불용설은 틀렸다는 유전학을 배운 사람들을 위한 글을 하나 써야겠다고....


후성유전학(後成遺傳學)


라마르크(장 바티스트 피에르 앙투안 드 모네 슈발리에 드 라마르크, Jean-Baptiste Pierre Antoin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1744. 8.1. ~ 1829. 12.18.)는 <동물철학>에서 "기린은 높은 곳에 있는 먹이를 먹기 위해 목을 계속 늘어뜨렸고 그 결과 지금처럼 길어졌다"라는 용불용설을 주장했다. 물론 이 학설은 당시의 학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했고,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발전한 현대 유전학은 용불용설을 철저히 밟으며 커나갔다. 


현대 유전학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진 육체적인 성과는 당대에 그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라마르크를 불러들여 쳐 부숨으로써 유전자 중심설을 공고히 다졌다. 라마르크의 이름은 한글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처럼 불명예로 남았다.


그런데 술자리 토론에서, 그것도 막걸리를 만들 때 사용하는 아스퍼질러스 균의 한 종을 두고 zygomysetes와 Aspergillus라는 전혀 다른 두 속 간의 접합균류인가, 아니면 후생유전에 의한 것인가라는 것으로 논쟁이 발전했다. 물론 이런 논의가 술맛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었다. 잘나가는 선배가 왕갈빗집에서 포도주까지 주문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후생유전학(Epigenetics)이란 뭘까? 현대 생물학에서는 "DNA 염기서열의 차이에서 기인하지 않았지만 대물림되는 유전자 발현에 관한 연구"로 정의했다(1). 쉽게 설명하면, 유전자는 동일한 데 유전자가 발현되는 방식이 달라져서 전혀 다른 외형적 특징을 나타내고, 또 이것이 유전되는 현상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환경변화는 유전자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유전된다.


그럼 용불용설의 주장처럼 획득형질은 유전된다는 것일까? 아직까지는 그렇다기보다는 용불용설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정도까지 전진한 것 같다. "획득형질이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질을 획득할 수밖에 없는 환경조건으로 인해 해당 형질을 만드는 데 유리한 유전자가 장기적으로는 유전자 풀에서 많아지는 것"이라는 설명에서 보듯이 여전히 유전자 중심주의적 설명을 곁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주목받는 라마르크


뉴욕타임스와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에 기고하는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도브스(David Dobbs)는 유전적 순응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는 데, 다음과 같이 세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다.


먼저, 생물체, 또는 집단은 유전자 발현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표현형(기능 및 형태)를 바꾼다. 이 표현형을 지원하고 지지하는 유전자들이 등장하고, 마지막으로 그 유전자가 집단내로 퍼져간다(ref).


이러한 주장은 리처드 도킨스이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서 콘크리트를 친 유전자 중심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대한 리차트 도킨슨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ref).


유전적 순응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이 변화를 고정시키는 것은 결국 유전자이고, 모든 것은 유전자로 돌아온다.


리차드 도킨슨의 주장처럼 결국은 유전자로 귀결된다. 그렇지만 이는 결론이 그렇다는 것이지 과정마저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리노이 대학의 진 로빈슨은 아프리카 말벌의 유전적 순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정했다.


최초에 아프리카로 진출한 일벌은 자신들의 포식자에 대항하기 위해 더 큰 공격성을 가져야 했다. 이는 더 많은 병정벌로 발현했다. 어느 날 더 강한 공격성을 주는 유전자가 등장했고, 이 유전자는 곧 집단내로 퍼져나갔다. 이 결과 아프리카 말벌은 일벌과 다른 유전자를 가지게 되었다.


웨스트-에버하트 등 후생유전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유전자는 진화를 이끄는 주체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한다. 유전자 발현이 먼저 달라지고(후생유전) 후에 유전자 풀에 반영된다는 주장이다. 더 이상 유전자가 우리 삶의 주체가 아니며,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리차드 도킨슨이 펄쩍 뛸 일이다.


후생유전학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닮았다. 이를 앞의 기린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바꾸어 보자.


기린은 높은 곳에 있는 먹이를 먹기 위해 목을 계속 늘어뜨렸다. 그 결과 유전자 발현이 달라지면서 목이 긴 기린이 출현했다. 어느 날 목을 길게 하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기린 집단 내로 그 유전자가 퍼져나갔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기린은 목이 긴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이 긴 돌연변이는 획득형질, 즉 유전자 발현을 안정적으로 고정하는 역할에 불과하다는 설명도 가능하지 않을까. 리차드 도킨슨은 일부만 맞다. 라마르크도 일부는 옳다. 획득형질이 유전되지 않지만, 유전자에는 반영된다.


40대가 배운 교과서의 지식은 벌써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대개의 이론이 그렇듯이 언젠가는 바뀔 것이었지만, 당 세대에서 이렇게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따라잡기란 쉽지 않다. 선생님들! 4지 선다형 질문지에 너무 확정적인 표현을 하지 말았으면 하고 부탁드리고 싶다.



수원 왕갈비를 산 선배의 말처럼 수조 원의 돈을 벌어 주었다는 그 곰팡이 균은 새로운 균일까, 아니면 단순히 두 종류의 접합균체에 불과할까? 두 종류 균의 DNA를 동시에 가진 새로운 균주라면 네이쳐(Nature)에 실리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단지 단단한 공생이나 기생 관계라면 그것도 굉장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결론이 나든 나야 막걸리에 왕갈비 한번 더 뜯을 수 있는 기회는 생길 것 같다.


그것보다는 리차드 도킨슨의 유전자 중심주의는 언제까지 왕좌를 지킬 수 있을까, 라마르크는 완전한 명예회복이 가능할까? 그게 더 궁금하긴 하지만 나는 왕갈비에 더 끌린다. 후생적 습관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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