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좀 마신다면 홉 정도는 알아줘야지!
맥주 사진만 봐도 괜스레 가슴이 뛰는 맥덕들에겐 흔한 상식이겠지만, 맥주는 4가지 원료(물, 맥아, 홉, 효모)로 만들어진다.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게 물(H2O), 주원료인 맥아, 향을 더하는 홉(Hop), 그리고 발효의 주체인 효모(yeast)이다. 이 네 가지 원료가 어떻게 배합되느냐, 또는 어떤 종류를 가져다 쓰느냐에 따라 맥주 맛은 크게 좌우된다. 물론 이외에도 다양한 원료나 첨가제가 사용되기도 하지만 순수한 맥주는 이 4가지를 기본으로 만들어진다.
오늘은 그 원료 중 맥주를 맥주답게 느끼게 만드는 홉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나의 궁금증을 우선 풀고 싶은 게 첫 번째 이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홉이 다시 소득작목이 될 수 있을지 그 가능성도 파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수제 맥주 붐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홉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농업적인 관점에서도 한번 다뤄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릴 때 고향마을에서도 홉을 재배하는 걸 본 적이 있었는 데, 개암같이 생긴 게 참 신기하게 느껴졌었다. 자! 그 신기한 홉의 세계로 떠나보자.
홉(Humulus lupulus)은 삼 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관령 일대와 경상북도 북부지역에서 재배되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잘 자란다. 홉은 1년에 8미터까지 자라지만 가을이 오면 줄기 부분은 죽고, 이듬해 봄에 뿌리에서 다시 싹이 난다. 꽃은 암수가 따로 피고, 열매는 개암처럼 생겼는데 속에는 기름과 유지가 들어 있다. 맥주 원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대규모로 재배되는게 일반적이지만 정원에서 넝쿨식물로도 널리 재배된다.
1919년 영국 켄트에서 처음 홉의 품종 개량이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약 80여 종의 홉 품종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다. 주 용도로는 맥주에 맛과 향을 더하는 첨가제로 사용되는 데 쓰고, 강한 풍미와 산미를 느끼게 하여 맥주 맛을 결정짓는데 가장 중요한 성분 중 하나로 평가된다.
홉의 생산량은 10만 톤을 조금 넘어가는 데, 최대 생산국은 역시 맥주 대국인 독일(34,434톤)이고, 미국, 에티오피아, 중국이 뒤를 잇고 있다. 특이한 것은 북한도 2천 톤 가량을 생산하고 있으며, 영국(1,650톤)도 9위에 그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2012년).
이미 언급했듯이 홉은 대부분의 기후와 토양에서 잘 자란다. 그렇지만 홉의 재배는 다른 이야기이다. 덩굴식물이기 때문에 크게 자라기 위해서는 격자모양의 지지대와 덩굴이 타고 올라갈 케이블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처럼 여름에 태풍이 몰아치는 환경이면 크게 재배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
홉은 암수가 구분이 되는 식물이다. 그러니 농업적인 목적으로는 암수만 필요하다. 씨앗이 수정된 홉은 발효하는 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홉은 뿌리를 잘라서 증식하는 방법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홉을 심을 때는 2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심는다. 홉의 수확은 여름 끝무렵에 하는데, 줄기를 걷은 다음 홉 꽃망울을 손으로 딴다. 아! 물론 상업적으로는 이 용도의 기계를 사용한다.
수확된 홉은 홉 하우스(Oast house)라는 곳으로 모아지고, 여기서 건조와 제품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제품화라 해봐야 압착기로 눌러서 이동하기 평하게 만들거나 분쇄하여 펠릿으로 만드는 게 전부이다.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홉은 대부분 펠릿 형태로 들어온다. 이로서 맥주 만들 준비는 끝이 났다.
홉을 처음 재배한 기록은 736년 독일의 Hallertau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양조에 사용된 기록은 그보다 약 3백 년이 흐른 1079년이다. 이런저런 기록을 살펴보면 13세기 정도부터 홉이 양조에 본격적으로 사용된 듯하다. 아마도 홉 품종이 본격적으로 육종 되기 시작한 1900년대 이전에는 지역별로 고유한 또는 도입 품종이 재배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연히 품종은 수 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홉의 육종은 영국 켄트에 소재한 와이 칼리지 살몬 교수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살몬(E.S. Salmon) 교수는 1934년 'Brewer's gold'라는 양조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홉 품종을 출시한 이후 1959년 죽기 전까지 20여 품종을 만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80여 품종이 개발되어 재배되고 있으며, 새로운 품종들이 맥주 양조에 계속 등장하고 있다.
어떤 홉 품종을 사용하느냐는 그 지역의 맥주를 규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페일 라거(pale larger)는 유럽 노블(noble) 홉 품종인 사즈(Saaz), 헬러토(Hallertau), 스트리젤 스팔트(Strissel Spalt) 등으로 만들어지고, 브리티시 에일은 퓨글(Fuggles), 골딩(Goldings), W.G.V. 품종으로, 북아메리카 맥주는 캐스캐이드, 콜럼버스, 센터니얼 홉 등으로 만들어진다.
호주와 뉴질랜드 역시 농업대국답게 그 지역에 특화된 품종을 재배하고 있다. 이는 그 지역 맥주의 독특한 맛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인자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고유 품종의 홉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과연 우리나라가 맥주 대국이 될 수 있을까? 오늘날 불고 있는 수제 맥주 열품이 오히려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홉은 여느 식물과 마찬가지로 수분, 셀룰로스, 다양한 종류의 단백질, 그리고 여러 가지 화합물로 이루어져 있다. 셀룰로스와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홉을 재배하진 않으니 홉에 들어 있는 화합물에 집중해보자.
알파산(Alpha acid 또는 humulone). 홉에서 가장 중요한 성분이다. 알파산은 맥아를 끓이는 과정에서 이소알파산으로 변하는 데, 이게 맥주의 쓴맛(bitter)을 내는 주성분이다.
베타산(Beta acid). 이 물질은 쉽게 산화되는 특징이 있는 데, 맥주 맛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어찌 제거할 방법은 없고, 홉을 선택할 때 베타산이 적게 들어있는 홉을 고르는 수밖에 없다.
에센셜 오일(essential oils). 에센셜 오일의 주성분은 테르펜류(terpene hydrocarbons), 미르센(myrcene), 휴물렌(humulene), 카르요필렌(caryophyllene) 등이다. 이중 미르센은 신선한 홉의 톡쏘는 향을 대표하고, 휴물렌의 산화물은 맥주를 대표하는 홉향을 나타낸다. 여기서 언급한 4종의 엔센셜 오일이 홉에 들어 있는 오일의 80-90%를 차지한다.
플라보노이드(Flvonoids). 여느 식물처럼 홉에도 플라보노이드가 들어있다. 가장 많은 성분은 잔소휴몰(xanthohumol)이고,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플라보노이드가 들어있다. 그렇지만 이 플라보노이드가 맥주 맛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알려진 바는 없다. 별로 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홉이 꼭 맥주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허브차 용으로도 사용되고 있고, 일부 상업적인 음료에도 사용되었다. 말타와 크바스라는 음료에 사용되었다고 하는 데, 이 음료가 뭔지는 나 역시도 알지 못한다. 어린 홉의 줄기는 식재료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 데 아스파라거스처럼 요리를 해먹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자라지 않으니 홉 줄기 요리를 먹을 기회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외에도 의학적인 목적으로도 홉이 사용되었다. 흥분과 근심을 가라 앉히거나 불면증을 완화하는 용도였다. 베갯속으로 홉을 채워서 사용하면 불면증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있다고 한다. 동물실험에서는 홉의 진정제로서도 약효를 나타내기도 했다.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맥주를 마셔서 이 효과를 기대하시는 분은 없기를 바란다.
기술적으로 안될 이유는 전혀 없다. 우리나라에서 상업적인 커피 재배가 되지 않는 것은 기후 탓이지만 홉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상업적으로 재배하는 곳이 없다. 최근 수제 맥주 열풍이 불면서 일부 사람들이 홉의 뿌리를 들여와 소규모 재배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홉 뿌리를 구하기 어렵다 보니 가격이 아주 높게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 재배면적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을까? 우리나라도 영국처럼 홉 재배 농장이 6차 산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아직은 그런 희망이 보이진 않는다.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그렇지만 예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단순히 농업적인 생산을 목적으로 재배해서는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다. 규모의 경제와 함께 재배를 위한 기술적인 뒷받침과 농기계의 보급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홉 향기에 취해 수많은 맥덕들은 맥주집을 찾을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은 밋밋한 라거 대신에 홉이 잔뜩 들어간 인디언페일에일(IPA)를 찾을 것이다. 강한 홉 향과 홉이 만들어 내는 톡쏘는 쓴맛, 높은 알코올 도수가 만들어 내는 묵직한 뒷맛, 한 잔에도 핑~ 돌게 만든다. 오늘은 어떤 홉이 들어간 맥주를 마실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