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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Jul 14. 2019

씨 없는 수박에서 보는 진화론의 진화

종(種)의 합성과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더운 여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계절이 되면 수박을 찾습니다.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은 무더위를 잊게 할 만큼 맛있지만, 씨앗을 뱉어 내는 건 어지간히 번거로운 일입니다. 아마도 제가 딸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런 번잡함이 없이 우아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도 포함됩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요? 수요가 있으면 뭐든 만들어집니다. 씨 없는 수박이라고 예외는 아니겠죠. 누군가가 그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습니다.


농경의 역사는 씨앗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農夫餓死 枕厥種子)"라는 말처럼 좋은 씨앗을 구하는 건 농부의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씨 없는 과일은 어떻게 다음 세대를 남길까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마지막은 난이도가 좀 있는 "씨 없는 수박"으로 하자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씨 없는 수박에서부터 진화론을 보완한 세기적 발견까지 긴 여정을 시작해볼까요!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


제가 십여 년 동안 일했던 농촌진흥청 농업과학원은 수원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전철 1호선을 타고 화서역을 지나 수원역에 다다를 때쯤 오른편에  꽤나 규모 있는 호수가 보이고, 그 너머에 작은 산이 감싸고 있는 특징없는 관공서 건물들이 모여있습니다. 건물은 낡았지만 이런 멋진 캠퍼스에  근무하는 건 제가 받은 가장 큰 특혜였습니다.


산골에서 갓 올라온 촌놈에게 서호는 바다만큼 넓게 느껴졌습니다. 정조시대에 수원 화성과 함께 축조된 서호는 축만제(祝萬堤)라는 이름이 하사되었습니다. 서호의 넓다란 둑길은 예전에는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 했다죠. 그리고 농업과학원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산은 철새 도래지로도 유명한 여기산입니다. 점심을 먹고는 산책 삼아 산 정상까지 한 바퀴 돌아오기도 했죠. 불과 30-40분 이면 충분할만큼 작고 아담합니다.


여기산 중간쯤에는 규모가 있는 묘가 하나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어김없이 추모행사가 열리는 걸 매번 지켜봐 오면서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바로 우장춘 박사(1898.4.8.-1959.8.10.)입니다. 농업연구기관에 있었지만 제 전공이 육종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보니 일반인들에 비해 우 박사에 비해 더 많이 아는 것도 없습니다.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육종학자 정도가 제 지식의 한계였습니다.



씨 없는 수박과 배수체 유전자


이제 좀 난이도가 높은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앞의 글에 비해 어려울 것 같아서 이 글을 가장 늦게 쓰기로 했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것 같지도 않아서 별로 쓰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제 공부 이상의 의미를 갖기는 어렵겠죠. 그래서 늦어졌습니다. 그럼 시작해보죠. 안전벨트를 단디 매 주세요!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의 유전 정보는 염색체(Chromosome)에 담겨 있습니다. 염색체는 DNA로 연결된 긴 실타래 정도로 보면 되겠죠. 이 염색체는 대부분 이배체(2n)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의 염색체는 모계로부터 물려받고 또 다른 하나는 부계로부터 물려받아 같은 염색체를 두 개씩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한 세포에는 23개의 염색체가 이렇게 쌍으로 있습니다. 이를 이배체로 부르고 '2n'으로 표기합니다.


다시 씨 없는 수박으로 돌아와서, 씨 없는 수박은 11쌍의 염색체, 즉 22개의 염색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22개 염색체(2n)가 생식세포에서 감수분열을 통해 11개의 염색체(n)를 가진 꽃가루와 11개의 염색체를 가진 난세포(n)로 분리되고 수정(교잡) 되면서 다시 22개의 염색체를 가진 수박으로 만들어집니다.


꽃가루(n) + 난세포(n) -> 수박(2n) * 정상적인 수정을 할 경우


그런데 수박에 콜히친(colchicine)이라는 물질을 처리하면 감수분열을 할 때 11개로 나눠지지 못하고 체세포 분열처럼 22개의 염색체를 가진 생식세포(꽃가루와 난세포)가 만들어집니다. 수분을 하면 4 배체의 수박이 되겠죠.


꽃가루(2n) + 난세포(2n) -> 수박(4n)   * 콜히친을 처리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4 배체 수박을 정상 수박(2n)과 교배하면 3 배체 수박이 만들어집니다. 3 배체 수박의 씨앗은 정상적으로 만들어집니다.


꽃가루(n) + 난세포(2n) -> 수박(3n)


이렇게 만들어진 3 배체 수박을 다시 심으면 꽃을 피우기는 하지만 3 배체의 불완전한 난세포를 형성하여 수정을 해도 정상적으로 씨앗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꽃가루(n) + 난세포(3n) -> 수박(씨없는)". 그렇지만 수박은 수정이 이루어졌으니 후세대를 만들기 위해 대부분의 에너지를 씨앗과 그 과육을 만드는 데 쏟습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보상이 돌아오진 않습니다. 잘해야 씨앗의 흔적이나 쭉정이만 남기는 정도겠죠.


씨 없는 수박이 만들어지는 과정 (1)  * 한국바이오안전성센터


이렇듯 씨 없는 수박은 유전체의 배수성(倍數性)을 이용하여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다 거치기 때문에 2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됩니다.  이외에도 3 배체 수박은 꽃이 피어도 결과(結果) 되는 비율이 많이 떨어지고 기형과도 많아서 상품성 역시 떨어집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중에서 배수체를 이용한 "씨 없는 수박"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 박사가 만들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씨 없는 수박 하면 우장춘 박사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실제로 씨 없는 수박은 1947년 일본 교토대학교 육종학자인 기하라 히토시 박사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어쩌다 씨 없는 수박은 우 박사의 작품으로 알려지게 됐을까요? 다음의 글을 참고해보시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우 박사의 ‘씨 없는 수박’은 신품종에 대한 불신을 없애기 위해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활동의 일환이었다. 우 박사는 기하라 히토시 박사가 육종에 성공한 씨 없는 수박을 일본에서 들여와 보급하며 관심을 끌었다. 당시 육종의 과학적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기자들은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켰다(2).


우장춘 박사는 일본에서 개발된 씨 없는 수박을 들여와 국내에서 시연함으로써 아직 태동기에 있던 우리나라 채소 육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을까요.


일본에서 귀국한 후 우 박사는 한국 농민들을 위해 무, 배추 등의 우량 종자를 개발해 보급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국내에서 개발된 종자들을 사용했다가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일본의 종자만을 고집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 기술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3).


그런데 이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 박사의 위대한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알고는 또 소름이 돋았습니다. 다음에 전개될 종의 합성, 다윈의 '종의 기원'이 아니라  우장춘 박사의 '종의 합성'에 관한 이론입니다. 씨 없는 수박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종(種)의 합성


진화론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콤보(combo)로 새로운 종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진화론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자연선택설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종은 자연선택만 아니라 종의 합성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는 게 증명됩니다. 바로 우장춘 박사에 의해서 말이죠. 노벨상을 받아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대발견이었다.


앞에서 "씨 없는 수박"에 대해 설명했던 배수체 염색체가 여기에 등장합니다. 1936년 미국의 유전학자 블레리크슬리와 애버리는 세포분열 단계에서 콜히친(colchicine)을 처리하여 염색체 간 분열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식물의 배수체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지만 그 원리까지 밝히진 못했습니다.


Triangle of U, 우의 트라이앵글   *wikipedia


우장춘 박사(도쿄제국대학교)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1936)에서 현존하는 종을 재료로 하여 다른 종을 실험적으로 합성합니다. 배추와 양배추를 서로 교잡하여 유채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염색체가 9개인 일본 재래종 배추와 염색체가 10개인 양배추를 교배해서 염색체가 19개인 유채를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을 유전학적으로 규명하여 종간잡종과 종의 합성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 하면 종의 합성을 실증한 이론으로 "Triangle of U, 우의 삼각형"이라고 세계육종학 교과서에도 실려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같은 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습니다. 이 실험은 교배를 통해 새로운 종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해서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됩니다(5).


씨 없는 수박은 이런 배수체의 연구결과를 약간 응용했다고 할 수 있겠죠.


Wikipedia에는 우장춘 박사를 korean-Japanese botanist(한국계 일본 식물학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데 가담한 후 일본으로 도주했던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우장춘 박사는 평생 일본에서 공부하고 성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가족과 이별하는 선택을 합니다. 해방 이후 정부수립을 겨우 마친 조국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기반의 전무했던 한국의 농업연구를 위해 헌신합니다. 1950년 5월 10일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 이후 신품종 무와 배추를 개발하여 보급하고, 채소의 수경재배를 도입했고, 씨감자 연구를 시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등 오늘날 우리나라 원예산업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해마다 많은 후학들이 여기산에 모여 그 뜻을 기리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은 수박을 드실 겁니다. 그런데 예전에 비해 수박씨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보고 놀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이게 혹시 GMO나 씨 없는 수박은 아닐까,라고 말이죠. 요즘은 배수체를 이용해서 씨 없는 수박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대신 육종을 통해 씨가 거의 없는 수박을 생산합니다. 예전처럼 씨 때문에 수박을 못 먹겠다는 불평을 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죠. 그래도 씨앗은 있어야 내년에도 수박을 먹을 수 있으니 그 정도는 참아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씨 없는 수박을 우장춘 박사가 만든 건 아니지만 그 보다 훨씬 대단한 “종의 합성”이라는 세기적인 이론을 만든 과학자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저질러 놓은 역사의 참극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위대한 발견이 오히려 대중적 관심에 의해 오히려 가려지는 현상도 봤습니다. 씨가 있던 씨가 없던 어제의 수박과 오늘의 수박이 같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콜히친(colchicine) : 백합과의 구근식물(球根植物) 콜키쿰(Colchicum autumnale)의 종자와 비늘줄기에 함유되어 있는 알칼로이드로 세포분열을 멈추게 하는 작용을 한다(4). 통풍 치료 등 의약품용으로 주로 사용된다.



참고문헌


(1) 한국바이오안전성센터. 씨없는 수박은 GMO? 

(2) KAST 과학의 거인. 대한민국의 씨앗 독립을 일군  우장춘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 소장

(3) The science times. 조국은 그를 인정했다. 우장춘 (하)

(4) 과학백과사전. 콜히친(colchicine )

(5) The science times. 우장춘 박사의 ‘삼각형’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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