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의 몸 이야기]
호주 워킹 홀리데이에서 돌아온 후 휴학 기간이 6개월 남아있었다. 낮에는 치매에 걸리신 할머니를 돌보며 집에 있다가 엄마가 퇴근하시면 술을 마시러 나갔다. 밤새 술을 먹고 들어와 위액이 나올 때까지 토하고 할머니 식사만 겨우 챙겨드리고 골골대면서 하루 쉬고 그다음 날 저녁이면 또 술을 마시러 나갔다. 2년을 휴학하는 바람에 일찍 군대 갔던 동기들이 하나둘 제대를 했고, 복학 전에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학원에 다니다가 해가 지면 모여서 술을 마셨다. 대부분의 여자 동기들은 이미 졸업했을 때, 나는 군대 갔다 온 동기들과 함께 복학을 했다. 새내기 때만큼 작정하고 술만 마신 건 아니지만, 복학생이 된 후에도 안 마신 날보다는 마시는 날이 더 많았다. 호주 농장에서 일하면서 근육으로 탄탄해졌던 몸은 금세 군살로 뒤덮였다.
복학 후 한동안 새벽 수영을 다니기도 했는데, 전날 술을 많이 마시고 새벽에 수영을 하다 풀에 토할 뻔한 날이 많아져서 그만두었다(다행히 나오기 직전에 화장실로 튀어갔다). 20대 체력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늦게까지 술 마시고 몇 시간 잠도 안 자고 일어나 수영을 하고 영어학원을 갔다가 학교에 가는 생활을 몇 달 했으니. 젊어서 버텼지만, 안으로는 몸속 장기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 같다. 들리지 않아서 본의 아니게 방치를 했다. 아니, 내 몸을 학대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복학생이 되어서 1, 2학년 때와 달라진 점은 전에는 사시사철 술만 마셨다면 이제는 3월, 5월에 술 마시고 4, 6월에 시험공부하느라 밤새운다는 정도? 2학기도 마찬가지였다. 돈 없는 대학생들이라 안주로는 떡볶이 한 그릇 시켜서 숟가락으로 손톱만 한 크기로 잘라 놓고 소주만 계속 비웠다. 안 그래도 싼 대학교 앞 술집에서 안주 안 시키면 안 되냐며 기본 안주만 리필해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소줏값 3천 원마저 없어 술집에 가지 못하는 날엔 슈퍼에서 천 얼마짜리 소주를 사서 노천극장에 앉아서 먹었다. 과자도 잘게 잘라서 소주 한 잔에 새우깡 반 토막씩 먹었다.
나는 술을 못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자제가 전혀 안 되는 사람이라 마셨다 하면 필름이 끊겼다. 그렇게 복학생으로서 1년쯤 지냈더니 몸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심하게 토한 어느 날 얼굴에 반점이 잔뜩 생겼다. 엄마는 등짝 스매시를 날린 후 나를 한의원에 데려가셨다. 손목 진맥을 하던 한의사가 20대 초반의 맥박이라기엔 너무 가라앉아 있다고, 뭐 했냐고 물었다. 엄마는 진료실에서 한 번 더 등짝 스매시를 날리셨다. 진단명은 ‘술독’이었다. 의사는 술독을 빼야 하니 한약을 먹으면서 한 달 동안 절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다. 매일 같이 술을 마시던 친구들은 한약이 배달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시자고 했다.
복학생 입네, 하고 앉아서 공부만 하거나 앉아서 술만 마셨더니 허리가 자주 아팠다. 몸을 너무 안 움직인다는 생각에 학부 산악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은 산에 올라가서 마시는 술맛이 좋아서 따라다녔다(물론 산에서 술 마시면 안 된다). 무거운 몸을 끌고 몇 달에 한 번씩 운동한다는 명목으로 등산 배낭에 팩 소주를 챙겨 다녔다. 어느 여름에는 2박 3일로 지리산 종주를 했다. 올라갈 때나 능선을 탈 때는 괜찮았는데 마지막 날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리며 무릎이 아파 힘을 줄 수가 없었다. 허리 통증도 심했다. 올라갈 때는 선두였는데 내려올 때는 꼴찌였다. 남학우에게 업혀서 하산하는 여학우들도 있다고 들었지만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끝까지 내색하지 않고 내 발로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온 뒤 정신없이 이틀을 뻗었다가 사흘째 겨우 몸을 일으켜 정형외과에 갔다. 의사가 물었다. 뭐 했냐고. 무릎 연골이 다 닳았다고. 허리 디스크도 심해서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친구들은 수술 날짜가 나오기 전에 얼른 술 마시자고 했다. 늘 그런 식이었다. 다행히 어린 나이니까 수술하지 말고 지켜보자고, 대신 치료 열심히 받고 운동하라는 최종 진단을 듣긴 했지만, 그 후로는 20년 가까이 디스크 환자로 살고 있다.
한창 술을 물처럼 마실 때 선배들이 충고했다. 너 그러다 평생 먹을 술 지금 다 먹는다고, 다시는 술을 못 먹게 될지도 모른다고. 웃어넘겼는데, 그 말이 딱 맞았다. 서른이 넘자 내 몸은 더 이상 알코올을 분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는 맥주 한 캔만 마셔도 취한다. 평생 먹을 수 있는 알코올 총량의 법칙이 있는 모양이다. 술꾼 중에는 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리가 좋아서, 사람이 좋아서 마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아니었다. 나는 술맛을 좋아했다. 소주도 갈수록 순해지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참이슬 ‘빨간 뚜껑’을 시키던 사람이다. 농활과 산악회 덕분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 지역의 소주를 다 먹어보았는데 그중 경남 쪽의 시원 소주가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인터넷 쇼핑이 없던 시절, 부산 출신 동기에게 박스째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내가 하도 소주 맛을 따지자 친구들이 눈 감고 소주 브랜드를 맞히라고 시험을 해 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정확히 맞혀서 “인정!”이라며 박수를 받기도 했다. 방종의 결과, 그 좋아하던 술을 못 먹게 되어 버렸다.
왜 그렇게까지 마셨을까. 아마 테스트해 봤다면 알코올 중독이라고 나왔을 것이다. 술맛을 좋아했다고 썼지만, 그렇다 쳐도 지나치게 많이 마셨다. 왜 그랬을까. 10대 후반에 IMF가 터졌다. 고등학교 근처에 노숙자들 수십 명이 모여 있어서 등하굣길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저씨, 아줌마들을 마주쳐야 했다. 선생님들은 돈 벌고 싶으면 이과에 가라고 했다.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으면 공대에 가라고 했다. 역사를 좋아해서 사학과에 가고 싶다고 진로 희망서에 솔직히 썼다가 교무실로 불려 가 혼났다. 부모님의 직업, 선생님이 말해주는 직업 외에 아는 진로는 많지 않았다.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하자 아빠는 학교에 다니지 말라고 하셨다. 친구들과 같이 학교에 다니고 싶었던 어린 나는 울면서 만화가 안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수학을 지지리도 못하는데 이과를 갔고, 의대에 갈 성적은 못되어서 공대에 진학했다. 대학에 갔더니 내 눈에 외계어로 가득한 수학, 물리 전공 도서를 소설책 읽듯 술술 읽는 친구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강의 시간 내내 조사 말고는 이해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전과를 하거나 수능을 다시 볼 의욕도 없었다. 그러려면 또 공부를 해야 하니까. 고민하고 진로를 다시 결정하고 공부를 하는 대신 나는 손쉬운 도피처를 찾았다. 그게 술이었다.
시키는 대로 살던 범생은 성인이 되자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술독에 빠지고 말았다. 몸이 망가질 때까지 술을 마셔도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내가 술을 매일 마시지 않게 된 건 좋아하는 것을 찾고 계약직으로나마 일을 시작한 이후였다. 술보다 재미있는 게 생기자 자연스레 술 생각이 나지 않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만난 인연 중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원하는 걸 확실히 아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호오(好惡)가 분명한 건 타고난 성격도 있겠으나, 주관 없이 남의 말에 휘둘릴 때 내가 내 몸을 어떻게 학대하는지를 알기에, 이제 그 지경이 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게 적절한 답일 것 같다. 내가 스스로 고민하고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공허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그 대가는 아주 혹독해서 더 이상 좋아하던 술을 못 마시게 되어 버렸지만,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