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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Jul 31. 2024

자기 학대와 혐오의 끝

[울림의 몸 이야기]

‘취준생’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 언제까지 백수로 시험 준비만 할 수 없어서 원하던 방송사에 계약직 조연출로 지원했다. 여느 때처럼 술을 진탕 먹고 늦잠을 자던 어느 날 오전, 합격 전화를 받았다. 바로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 했다. 꿈에 그리던 방송사였기에 비록 계약직이어도 기뻤다. 일을 잘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특차로 뽑아준 적도 있다던데? 라며 꿈에 부풀었다. 정말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간절했다. 


집에서 다니기에 먼 곳이라 원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회사에서 10분 거리의 오피스텔이었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 집에 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서너 시간 자고 나오는 게 전부였다. 10분 거리의 집에도 매일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일이 많았다. 편집실 붙박이가 되어 먹고 잠깐 눈 붙이는 시간 외에는 일하고 일하고 일했다. 입사 전부터 허리 디스크가 있었지만 병원에 치료받으러 갈 시간은 없었다. 운동할 시간도 당연히 없었다. 잘해서 눈에 띄고 싶었다. 일이 재밌었다. 초반에는 편집 못 했다고 혼나서 화장실 가서 눈물 빼기도 했지만 두 달째부터는 잘한다는 소리 들으며 일했다. 몸은 힘든 일이었지만 난 젊었고 열정이 넘쳤다. 밤샘이 일상인 직군인데도 선배들은 ‘너 진짜 밤 잘 새운다’고 엄지를 척 올렸다. 그런 말을 들으면 더 신나서 밤을 새웠다. 


겨우 백만 원 넘게 버는데 월세도 내고 휴대폰 요금도 내야 하니 선배가 밥 사줄 때 말고는 주로 김밥이나 컵라면,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어차피 식당까지 나갈 시간도 없어 편집실에서 먹으면서 일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졸음을 쫓으려니 커피를 물처럼 마셨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술 마실 시간이 없었다는 거다. 그런 생활 중에 술까지 마셨으면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방송이라는 일의 특성상 매주 결과물이 나오고 그걸 만인이 본다. 그래서 매 순간 평가를 당한다. 유튜브는커녕 종편 채널도 없던 시절이라 지상파 3사간 시청률 경쟁이 심했다. 이번 주 어느 프로그램 시청률이 몇 나왔더라, 예고를 잘 만들었더라, 그 부분은 누가 편집했는데 그따위냐, 이 부분은 음악이 이상했다, 자막 틀리게 나갔더라 등등 성과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으로 들려왔다. 물리적으로도 힘든 환경이지만 정신적으로도 늘 긴장 상태였다. 


게다가 나는 공채 조연출이 아니었으니 실력이 무르익기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과하게 긴장했고, 결과적으로 늘 눈치를 봤다. 계약직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후로 오래오래 후회했다. 겉으로는 언론 자유를 수호한다고 정규직들이 파업도 하고 이미지 좋은 회사지만, 그들이 파업할 때 방송은 계약직들이 다 만들었다. 파업 회의하는 정규직들을 지나쳐서 나는 편집실로 가서 밤새워 일했다. 파업 중에는 대여섯 명이 하던 일을 계약직 한 명이 다 처리해야 했고, 상사는 왜 퀄리티가 전처럼 나오지 않느냐고 욕을 했다. 일이 좋았던 것과 별개로 나는 날 학대하면서 일했다. 늘 더 잘해야 한다고 채찍질했고, 정규직 조연출보다 못하다고 느껴질 때는 그래서 시험에 떨어진 거라며 자책했다.


방송국에서 PD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작가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여성 작가들이 5~10명 쭉 앉아서 노트북에 열심히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고 가운데 상석에는 남성 PD가 앉아있는 게 거의 모든 회의실의 풍경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들은 엄청난 감정 노동을 하고 있는 거였지만, 당시 내 눈에는 PD 비위를 맞춰 돈 버는 걸로 보였다. 작가는 계약직이고 PD가 바뀌면 작가진을 다 교체하기 일쑤라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될 수도 있다. 밥줄을 쥐고 있으니 PD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게 당연하다. 내가 계약직이라서 정규직 PD들 눈치 보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러나 현장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씻지도 못하고 츄리닝에 슬리퍼 끌고 편집실에 며칠씩 짱 박혀 있는 내 눈에는 매일 집에 가서 자는, 매일 예쁜 옷으로 바꿔 입고 화장까지 하고 출근하는 여성 작가들이 편하게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연차가 좀 쌓이고 나서는 그녀들이 집에 가서도 쉬지 않고 밤새 원고를 쓰고, 매일 아침 꾸밈 노동까지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초보 조연출 시절에는 나 빼고는 다 편해 보였다. 그래서 협력해야 할 동료인 여성 작가들을 비난하고 혐오했다. 


입버릇처럼 ‘계집애들’이라며 욕을 했다. 글보다 화장에 더 신경 쓰는 계집애들, PD랑 출연자들 비위나 맞춰주는 계집애들, 아침마다 화장하고 때 되면 네일아트 받을 여유도 있는 계집애들, 회의실에만 앉아 있으면서 돈 받는 계집애들. 작가들은 일과 중 비는 시간에 다 같이 네일아트를 받으러 가도 PD들이 아무 말 안 했지만, 쉬는 날 네일아트를 받고 온 여성 조연출은 온 부서 사람들이 다 욕했다. 아주 편한가 보다고. 힘을 가진 남성 PD들이 여성 작가와 여성 조연출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달랐기에 우리도 서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첫 직장에서 2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끝내 정규직도 되지 못하고 일을 그만뒀다. 내 입장에서는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느낄만한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쯤 나는 살이 많이 불어나 있었다. 불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인스턴트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늘 잠이 부족해서 안 아픈 곳이 없었으므로 몸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일을 그만두고 다시 입사 시험 준비를 하던 어느 날 극심한 복통과 함께 혈뇨를 봤다. 식은땀을 흘리며 동네 병원에 갔더니 당장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종합병원 내과에서 검사를 해보더니 나를 산부인과로 보냈다. 내 배 속에 무려 14cm 크기의 물혹이 있다고 했다. 장기들이 다 눌려있어서 아팠을 텐데 몰랐냐고 의사가 물었다. 겉에서도 물혹이 만져질 정도로 큰데 왜 이제 왔냐고 물었다. 나는 몰랐다고, 그냥 살찐 건 줄 알았다고, 아픈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물혹이 너무 커서 난관 한쪽을 같이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돌이켜 보면 내가 뱉은 여성 혐오의 말들이 내 몸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여성을 비하할 때마다 내 몸속 여성 생식기에 상처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여성이 아니기라도 한 듯, ‘여자들이란’, ‘계집애들이란’이라면서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다. 내 몸과 나의 말은 분열하고 있었다. 나를 학대하면서까지 몸 바쳐 일했고, 동시에 여성인 내 몸을 혐오했다. 


14cm짜리 물혹을 떼어내고 나니 배가 쿨렁해졌다. 수술받느라 몸이 많이 축났는지 누워서 요양만 했는데도 살이 10kg 넘게 빠졌다. 물혹 때문에 배가 나오고 순환이 안 되어 몸이 더 부었는데 그것조차 몰랐다니 내 몸에 너무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그 와중에 살이 빠진 게 또 기뻤다. 그 수술에서 교훈을 얻었어야 했는데 어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울림의 몸 이야기] 자기 학대와 혐오의 끝



위에 적은 일은 이미 10년도 더 전에 겪은 일이고

지금은 방송 환경도 달라졌으니

여성 조연출과 작가들의 지위도 달라졌으리라 믿습니다. 

이후에도 다른 방송사에서 일을 하면서 

여성 작가들과 협력했고 그 노고와 입장 차이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솔직한 심정과, 그때 느낀 감정들이 제 몸에 영향을 미쳤음을 쓴 글일 뿐

특정 직종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지금 제 생각이 이때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혹시라도 읽으면서 불편한 분이 계셨다면 

철없는 20대 후반, 자격지심으로 가득했던 못난 초년생의 고백이라고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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