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의 몸 이야기]
배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물혹을 떼어낸 후 엄마가 해 주시는 밥 먹고 본가에서 편히 쉬면서 회복 시기를 가졌다. 저녁에 엄마랑 산책도 하고 밤에는 잘 잤다. 젊은 몸의 회복력은 무시무시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언론사 시험 준비 스터디에 나가며 바쁘게 공부를 시작했다. 계약직으로 현장을 겪어봤고 이 일과 잘 맞는다는 확신도 있었기에 전보다 더 치열하게 준비했다.
혹을 제거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살이 많이 빠져서 면접에 입을 옷을 새로 사야 했다. 전에는 여성복 매장에 맞는 옷이 없었는데 아무 여성복 매장을 들어가서 66 사이즈를 입어 봐도 다 몸이 들어갔다. 이래서 옷 입는 게 재밌다고 하는구나, 처음 알았다. 톱모델이었던 케이트 모스가 “먹는 재미보다 입는 재미가 더 크다"라고 말한 걸 들었을 때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무슨 헛소리냐며 고개를 저었는데 아주 조금 그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스터디 모임에 나가면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간다든지 화장을 잔뜩 하고 술을 마시러 가기도 하면서 평범한 20대 후반 여성 같은 차림을 잠시 즐겼다.
박차고 나온 회사의 입사 시험을 포기하고 다른 방송사 면접시험에서 또 미끄러지자 이제 선택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20대 막바지라 마음이 조급했다. 기자 시험에도 응시하기 시작했다. ‘언시(언론 고시)’ 판에서 나름 장수생이라 내공이 꽤 쌓인 나는 이제 필기에서 떨어지는 일은 잘 없었다. 늘 면접이 문제였다. 간절히 원했기에 잘 보이고 싶어서 준비를 많이 했지만 긴장해서 연습한 답안을 그대로 내뱉지 못하고 돌아올 때가 많았다. 기자 시험은 달랐다. 그다지 원하던 일이 아니라서 부담 없이 면접을 봤다. 내가 어떻게 보일까 과하게 신경 쓰지 않았다. 긴장은커녕 면접 대기실에서 졸다가 이름이 불려서 침 닦고 들어가기도 했다. 내 답변에 반박하는 면접관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힘을 뺐더니 성적이 좋았다. 세 언론사에 최종 면접까지 올랐고 시험 일자가 겹쳐서 포기한 곳을 뺀 두 곳에 최종 합격을 했다.
그때 인생을 조금 배웠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적당히 거리를 둬야 더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면접은 연애처럼 매달리기보다 밀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남들은 진작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요령 없이 미련한 편이라 다년간의 탈락 끝에야 겨우 그 이치를 깨달았다.
기대한 적 없던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수습 기간에는 빡셌지만 정식 채용 후에는 아무리 바빠도 매일 집에 가서 잠을 잘 수 있었다. 밥도 매끼 챙겨 먹었다. 전보다는 수월해진 노동 환경이었다. 연애를 8년째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정규직이 되었으니 결혼을 하기로 했다. 드레스 피팅을 해야 하니 살을 빼야 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가벼워진 편이었지만 여전히 예비 신부로서는 살집이 있는 편이었다. 11층 사무실에 매일 계단으로 걸어서 출근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계단으로 올랐고 칼퇴를 한 날엔 집 앞 요가 학원에 다녔다. 라면을 끊었다. 밤에 공원을 뛰기도 했다. 굶지도 않았고 PT를 받으며 혹독하게 운동을 한 것도 아니지만 스무 살 이후 처음 보는 적은 숫자가 체중계 위에 나타났다. 자신 있게 드레스 피팅을 다닐 수 있는 몸매가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결혼을 앞둔, 건강하게 군살 없는, 젊고 예쁜 서른의 예비 신부였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외모에 신경을 썼으니, 호주 농장에서 일할 때와 함께 ‘리즈 시절’이라고 꼽을 수 있을 만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겉보기와 달리 안으로는 그리 건강하지 못했다. 집에도 못 가고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일할 때보다 노동 환경은 좋아졌지만 기자 일은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단독이나 특종 욕심도 없고, 맡은 분야에 대해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배우는 것도 많고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직장이었는데 정작 즐겁지가 않았다. 신이 나지 않았다. 이유 없이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숨쉬기가 힘들 만큼 복통이 있어서 응급실에 가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돌려보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답답해서 위와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식도염, 위염, 장염 쓰리 콤보였다. 건강한 식사를 하고 매일 집에서 충분한 수면을 취했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결혼 준비도 순조로웠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건강한 생활 습관을 다 실천하고 있었지만 나는 소화기에 온통 염증이 가득했고 허리 디스크도 여전히 말썽이었다. 살도 빠지고 겉보기엔 건강해 보였지만 안으로는 잔뜩 상해 있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원치 않는 일을 한다는 것. 매일 8시간에서 많으면 16시간씩 좋아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 내 몸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심리학에서는 ‘신체화’라고 한다던가. 어른들 말로는 꾀병. 어쨌든 나는 아팠다.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됐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했는데, 지금은 정말 살만한 시기인데 왜 아픈 거지? 난 왜 ‘정상’적인 직장 생활에 만족하지 않는 거지? 욕심이 너무 많은 건가? 매일 집에서 자는데, 삼시 세끼 다 챙겨 먹는데 대체 왜 아픈 거지? 나조차 나를 이해해 주지 않고 몰아세워서 더 아팠는지도 모르겠다. 소화제, 소염제,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점심시간에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허겁지겁 죽을 먹고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사무실로 돌아와서 일했다. 친구들은 말했다. 누구는 좋아서 직장 다니는 줄 아냐고, 돈 벌려고 다니는 건데 마음에 쏙 드는 직장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남들은 좋아하지 않는 일을 온종일 해도 병이 나지 않는데 나는 왜 아픈 걸까, 또 자책했다.
겉보기에 좋아 보이는 직장, 겉보기에 예뻐 보이는 몸매가 꼭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싫은 일을 업으로 하면서 배웠다. 뭐가 그렇게 싫을까, 남들도 다 그러고 사는데 왜 그렇게 나는 유난일까, 자책만 했던 게 후회된다. 아픈 사람에게 그만하면 만족해야지, 감사할 줄 모르네,라는 말을 건넨 주변 사람들도 야속하다. 아픔에 자격을 매기지 않는 것, 그때 나에게 필요한 건 그런 지지였다.
계약직으로 일할 때는 극한으로 몰아붙여 몸을 망가뜨렸고, 안정적인 직장에서는 도무지 만족이 되지 않아 속이 부대끼다 못해 문드러졌다. 지금 돌아보면 일과 나를 동일시했고, 삶에서 일이 자치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컸기에 어느 직장, 어느 직종에서도 몸이 아플 때까지 일했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다. 이 일이 내가 원하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픈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일을 정규직으로 한다면, 원하는 채널에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아프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며 이직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