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의 몸 이야기]
나이보다 한참 어른 같은 말버릇을 갖고 있던 지인이 말했다.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는 대운이 들어와야 할 수 있다며, 지금 너는 운이 아주 좋은 시기니까 뭐든 도전해 보라고. 케이블 TV 여러 채널을 갖고 있는 회사에 경력직 PD로 면접을 봤는데 한참이 지나도록 결과가 나오지 않더니 다른 제작팀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관 중에 나를 좋게 본 사람이 있어 공고가 나지 않은 부서로 채용을 하겠다는 거였다. 바라던 직종에서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어 기뻤지만 그토록 원하던 지상파 3사 PD가 아니었기에 내 대운은 여기까지인 거냐며 웃었다. 이직과 결혼을 한 달 새에 치렀다. 다 가진 것 같았다.
PD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쇼 연출이 하고 싶어서였다. 서태지부터, 젝스키스, 팝 음악 등 대중음악에 늘 빠져 살았고 무대공연을 사랑했다. 큰 시상식 보는 걸 좋아했다. 인기 가수의 신곡이 나오면 무대를 어떻게 연출하면 좋을지 노트에 끼적이곤 했다. 연예인을 좋아하고 예능 프로그램, 코미디도 좋아했지만 가장 바라는 건 쇼 연출이었다. 그래서 음악이나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채널에 가고 싶었는데, 나를 채용한 채널은 패션 채널이었다. 옷은 그저 몸에 맞고 움직이기 편하면 그만인 내가, 가방에도 구두에도 주얼리에도 아무 관심이 없는 내가 패션, 뷰티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다니 잘된 일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고백하자면, 관심이 없는 정도를 넘어 그 세계를 혐오했다. 그저 옷일 뿐인데 브랜드 로고가 붙는 순간 가격이 수십, 수백 배씩 차이가 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고, 명품에 애써 번 돈을 안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에게 더 가혹한 외모지상주의에 분노했고 옷차림과 화장에 신경 쓰는 건 잘못된 풍토에 일조하는 거라 여겼다. 나는 비싼 옷을 입지 않아, 나는 화장을 하지 않아, 나는 의식 있어. 그렇지만 사실 예쁘고 잘 생긴 연예인을 선망하고 좋아했다. 외모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굳이 그 싸움에 끼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지만, 꾸밈 노동 전체를 깎아내리며 정신 승리를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세계에서 일을 해야 했다. 공부하듯이 매달 발행되는 패션 잡지를 샅샅이 정독했다. 디자이너 일대기 등 패션 관련된 책을 직구까지 해서 찾아서 봤다. 나가서 쇼핑몰이나 핫플레이스에서 유행하는 옷을 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문외한이었던 나는 패션도 글로 배우려고 했다. 그곳에서 일을 해서 그렇게 된 건지, 원래 관심이 있는 사람이 모여서인지 모르겠지만 부서 사람들은 패션에 조예가 깊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튀는 패션도 거침없이 소화했고 미팅 때 누가 디자이너고 누가 PD인지 분간이 안 갈 때도 많았다. 원래도 보이는 게 중요하고 사람을 '급'으로 나누는 방송계 분위기에 패션 채널의 전문성이 더해지자 내 외모와 옷차림에 대한 비판은 더 신랄해졌다.
어렵게 얻은 정규직 자리이기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썼다. 유명하다는 미용실을 찾아가서 머리를 하고, 백화점 1층 화장품 브랜드에서 메이크업 시연을 받은 후 제품을 싹 다 구매해서 따라 하기도 했다. 부유하게 자라 트렌드에 밝은 동료를 따라다니며 쇼핑을 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옷에 도전해 보기도 했다. 상사는 "공부 잘하고 편집실 틀어박혀 일하기보다 홍대 클럽 다니고 새로 연 옷 가게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함께 일하는 동료 중에는 후자가 많았다. 나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인재상에 부합할 수가 없었다.
외모에 신경 쓰는 건 고달프고 자신감이 떨어지는 일이었지만 방송 제작 프로세스인 기획 회의에 열심히 참여하고, 촬영장에서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밤새 편집을 하는 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매달렸다. 참고할 만한 해외 프로그램이나 레퍼런스 영상을 이 잡듯 찾고, 배정된 촬영 외에 선배들 촬영도 따라 나가고, 주어진 분량보다 더 많이 편집하려고 했다. 패션 센스는 어쩔 수 없지만 제작만큼은 잘한다고 인정받고 싶었다. 등산복 점퍼에 트레이닝복 차림이어도 연출력으로 인정받는 다른 채널 PD들이 부러웠다. 여기서 열심히 하다 보면 원하는 채널로 이동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
신혼인데 집에 들어가는 날이 거의 없었다. 일주일에 하루 집에 들러 기절하듯 자고 남편과 밥 한 끼 먹고 새 옷을 챙겨 다시 회사로 돌아오기를 몇 달 동안 했다. 남편은 처음에는 원하는 일을 하게 된 걸 축하했지만, 빨래만 던져 놓고 다시 일하러 가는 게 일상이 되자 "내가 네 빨래하는 사람이냐"라며 화를 냈다. 내 머릿속에는 제작으로 인정받아야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기에 그와 싸울 시간이 없었다. 어서 다시 회사로 가서 일할 생각뿐이었다.
잘한다고 인정받고 싶고, 더 잘할 수 있도록 성장하고 싶어서 일하는 양을 늘렸는데, 내 열정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에게 일을 맡겨놓고 퇴근한 뒤 상사에게는 자신이 한 것처럼 말하는 선배도 있었고, 한 달에 하루밖에 못 쉬고, 매일 한두 시간 눈 붙이는 게 전부인 내게 제작비를 아껴야 하니 운전까지 하라고 요구하는 선배도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일했다. 편집실에서 허리 통증을 참느라 이를 깨물다 못해 식은땀이 나고 어금니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몸이 떨리는데 방송 시간을 맞춰 테이프를 보내고 나서야 쓰러진 날도 있다. 고열에 시달리다 근처 병원에 가서 두 시간 수액 맞으며 자고 다시 일하러 간 날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커피로는 각성이 안 되어서 에너지 드링크를 쌓아놓고 마셨다.
그러다 어느 날, 이게 내 마지막 프로그램이 되겠구나, 알았다. 그 프로그램 마지막 회가 방송된 다음 날, 모처럼 집 침대에 누웠던 나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천장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팀장에게 전화해 병가를 냈다. 의사는 지금 몸 상태로는 운동도 하면 안 되니 집에서 가만히 누워서 쉬고 밥을 잘 챙겨 먹으라고 했다. 삼시 세끼 챙겨 먹고 누워서 쉬는 그 당연한 걸 몇 년째 못해서 몸이 온통 망가졌다. 열심히 일했고, 프로그램 성과도 좋았지만 병가를 냈더니 인사고과가 낮게 나왔다. 상사는 몸 관리도 실력이라고 말했다. 내 딴에는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지만, 회사에서는 그저 쓰기 좋은 일꾼을 부렸을 뿐 내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제야 세상을 알았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도 뼈아프게 배웠다.
몸만 아팠던 건 아니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일했는데 이용만 당하고 존중도 인정도 받지 못하니 배신감이 들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남들 다 쓰는 회사에 원서 한 번 내지 않고 하나만 보고 몇 년을 달려왔는데 내 손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절망스러웠다. 번 돈은 다 병원비로 나갔다. 다음에는 다르게, 더 잘해봐야지 분발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동네 병원, 유명한 한의원, 종합병원 몇 군데를 다녔다. 병가 3개월이 끝나가기에 다시 의사 소견서를 받아서 연장했다. 회사로 돌아가면 일하다 죽을 것 같았다. 실제로 과로사한 직원의 소식이 간간이 들려오는 바닥이기도 했다.
몸을 추스르고 복직을 앞둔 어느 날 고래가 찾아왔다. 모든 걸 걸었던 일에서 보상받지 못한 내게 찾아온 아기가 운명 같았다. 초음파에 피 고임이 있다고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복직한 첫날밤 11시까지 야근을 했다. 선배는 내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회사를 떠나 아이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임신 사실을 몰랐던 상사는 사직서를 내미는 내게 사무실에 다 울리게 큰소리로 소리쳤다. 여기 허리 안 아픈 사람 있는 줄 아냐고, 여기 몸 성한 사람 있는 줄 아냐고. 너처럼 약해 빠진 녀석은 필요 없다고. 서운하지도 않았다. 나는 회사에 고작 그 정도 직원이었을 뿐이다. 모든 걸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눈물이 쏟아졌다. 몇 년 동안 매달렸던, 내 전부 같았던 일이 끝났다. 쏟아내고 나니 후련했다. 이제 내겐 더 중요한 존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