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의 몸 이야기]
고래를 낳은 자연주의 출산 전문 병원에서는 산모와 아이가 같은 방에서 지내는 ‘모자동실’이 원칙이었다. 낳자마자 맨살을 대고 캥거루 케어를 하고 가슴 쪽으로 안아도 봤지만 태어나느라 힘들었는지 고래는 이내 잠이 들었다. 의료진들은 옥시토신 샤워로 고양된 상태인 내게 아이 잘 때 자 둬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저녁이 되고 체력을 회복한 고래가 젖을 찾기 시작했다. 고래는 젖을 물 줄 몰랐고 나는 물릴 줄 몰랐다. 고래는 배가 고파 앙앙 울었다. 옥시토신 효과가 떨어지자 잠이 쏟아졌다. 신생아가 울거나 말거나 나는 잠이 들어버렸고 남편은 분유를 먹이지 말라는 내 말 때문에 고래를 안고 달래며 진땀을 뺐다. 간호사가 들어와서 몇 번 더 모유수유 자세를 잡아줬지만 초유가 나오는 속도가 더뎌 고래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임신 중에 읽은 책에서 신생아는 모체에서 영양을 충분히 받아서 나오고 초반에는 태변을 배출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갓 태어난 아기를 배불리 먹이기 위해 분유 수유를 할 필요는 없다고 봤기에 고래가 울어도 조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병원은 내가 혼자 쓰는 공간이 아니었고 바로 옆방에서 밤새 진통하던 산모는 고래의 울음소리 때문에 쉬지 못하고 괴로워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분유를 조금 먹여 재우기로 결정했다. 몇 시간 동안 울던 고래는 허겁지겁 분유를 먹어 치우고 다시 잠이 들었다.
푹 자고 일어나 본격적으로 모유수유를 해보려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만성 척추질환자인 내게 앉아서 수유쿠션으로 아이를 받치는 자세는 너무 힘들었다. 고래는 깊이 물 줄을 몰랐고 유두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산부인과에서 퇴원할 때쯤에는 유두가 찢어져 유두보호기 없이는 젖을 물리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 어려운 출산도 해냈는데 모유수유가 복병일 줄이야.
퇴원하면서 유명한 모유수유 전문가를 찾아가서 유료 상담을 받았다. 국제 모유수유 자격증 등 여러 자격증을 벽면에 붙여놓은 전문가는 허리가 아픈 산모도 쉽게 할 수 있는 누워서 수유하는 자세를 알려줬다. 고래는 신생아 치고 몸집이 큰 만큼 힘도 좋았다. 아무리 유두를 깊이 물리려고 해도 뱉고 다시 자기가 원하는 깊이로 고쳐서 물었다. 전문가조차 이 아기는 깊게 물리기 어렵겠다고 말했다.
편한 자세를 배워왔으니 이제는 주야장천 물리는 일만 남았다. 의료 개입을 최소화하려고 비싼 자연주의 출산 전문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분유를 먹이면 뭔가 잘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조리원에서 마사지도 열심히 받고 유축하는 법도 배웠다. 퇴원 전날 밤을 제외하고는 계속 모자동실을 하고 밤중 수유를 했다. 그렇게 모유수유에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조리원 퇴원 후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모유수유는 전혀 수월해지지 않았다. 유두에서는 피가 났고 젖몸살도 괴로웠다. 수유패드를 대고 수유브라를 착용하는 것도 너무나 아파서 내복을 가위로 잘라 가슴을 다 드러나게 만들었다. 옷이 닿으면 머리가 쭈뼛 서도록 아파서 그 수밖에 없었다. 진통 때도 안 울던 나는 백일 동안 매일 울면서 수유를 했다.
흔히들 백일의 기적이라고 하면 아이가 밤에 통잠을 자고 수유텀이 벌어지는 걸 말하는데 고래는 통잠을 네 살이 되어서야 잤다. 그래도 나름의 기적은 있었다. 드디어 고래와 수유 호흡이 맞게 되었다. 젖양이 충분히 늘었고 고래도 잘 물게 됐다. 울지 않고 수유를 하다니 감개무량했다. 수유텀이 없어도, 내 외출이 자유롭지 않아도 괜찮았다. 웃으면서 ‘완모’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 고생한 보람이 충분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달라서 모유수유를 고집할 필요가 없음은 잘 알고 있다. 젖병을 씻고 소독하고, 때마다 분유를 바꿔주고, 젖꼭지도 단계별로 구매해서 바꿔주고, 분유를 타고 온도를 맞춰서 아이에게 주는 게 직접 모유수유를 하는 것보다 더 편한 사람도 있을 거다. 나는 아이가 원할 때 언제 어디서든 가슴을 열어 먹일 수 있는 완모가 더 편한 사람이었다.
고래는 나와 눈 맞춤을 할 수 있게 된 후로 수유 시간마다 눈을 맞추고 하트 광선을 내뿜었다. 배가 고플 때 옷을 들추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쭈쭈아”라며 젖을 달라고 요구했고 먹고 나면 뽀얘진 얼굴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모든 과정이 벅차게 행복했다.
가슴이 작아서 늘 놀림의 대상이었는데 가슴 크기와 젖양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고래는 태어날 때부터 늘 우량아였고 완모 아기인데도 ‘미쉐린’ 팔뚝을 유지했다. 고래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젖이 넘어가는 소리에 황홀했고 하얀 피라는 모유가 빠져나가는 느낌은 시원했다. 비로소 성적 대상으로서 작고 부족한 가슴이 아니라 내 새끼 배불리 먹이는 고마운 기관으로 가슴을 바라보게 됐다. 이 작은 가슴이 내 아이를 먹여 살리고 살찌운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여성이 ‘재생산’의 도구로 대상화되어 자궁은 아이를 잉태하고 낳기 위한 기관이고 가슴이 젖을 먹이는 기관으로 정의되는 건 여성으로서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첫 아이를 키우며 성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내 아이의 엄마로 잘 기능하는 내 몸이 사랑스러워졌다. 아이와 상관없이, 타인의 시선을 통하지 않고 내 몸을 충분히 아끼고 사랑해 줘야 마땅하지만 나는 고래의 엄마로서 제 몫을 다 하는 내 몸을 먼저 사랑했다. 충분히 날씬하지 않고, 충분히 글래머러스하지 않아서 늘 부족하게 느껴지는 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된 게 그래도 괜찮은 출발이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 내 몸을 받아들이고 아껴주는 여정으로 가는 데 고래를 낳고 먹이고 키운 경험은 큰 전환점이 되어줬다.
18개월이 되어 단유를 하던 날, 자기 전 마지막 수유를 하고 고래와 함께 창밖 밤하늘을 보며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했다. 한 달 전부터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고래에게 "고래가 많이 커서 밥을 잘 먹게 됐기 때문에 이제 쭈쭈 요정이 별나라로 간대. 쭈쭈 요정이 고래가 그동안 잘 먹고 잘 커줘서 너무 고마웠대. 별나라에 가서 언제나 고래를 지켜보고 응원할 거래."라고 말해준 터였다. 고래는 아쉬운 듯 보였지만 이내 받아들이고 손을 흔들고는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쭈쭈아?" 찾는 고래에게 "이제 쭈쭈 요정이 별나라 가서 없어."라고 말해주니 바로 수긍하고는 더는 찾지 않았다. 평화롭게 세상에 나온 고래는 단유도 평화롭게 했다.
오히려 아쉬운 건 나였다. 모유수유 하는 동안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에 내 몸이 힘들어져서 두 돌을 채우지 못하고 단유를 하는 게 속상했고, 육아의 첫 챕터가 끝나는 느낌이 들어 슬프기도 했다. 이제 눈을 반짝이며 쭈쭈를 먹는 고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처음 백일 동안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수유하는 18개월 동안 내 몸이 만들어낸 젖이 한 생명을 살리는 경이로운 경험을 만끽했다. 포유류 암컷임을 자각하며 그만큼 자연 앞에 겸손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누구나 하는 임신, 출산, 수유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닌, 그 특별한 경험을 잘 통과한 내 몸에 감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