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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faitement imparfaite Aug 18. 2020

양초 하나 못 사는 처지에 달빛을 갖고싶다고 징징대봐야

청약 당첨 후기

<달콤한 나의 블루캐슬> - 루시 모드 몽고메리


 난 살면서 무언가 당첨이란 게 되어본 적이 없다. 어릴 때  엄마 따라 간 마트에서 경품 추첨부터 시작해서 각종 사이트의 리워드 이벤트, 로또, 연금복권까지.. 하다못해 사다리 타기도 매번 꽝이다. 가 로또를 사지 않는 이유다.


부동산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던 내가, 얼마 전에 20살에 만들어놓고 납입도 안 하고 묵혀뒀던 청약통장의 존재를 드디어 찾아내어 미납분을 불입했다. 순위가 인정되려면 내년 2월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청약 통장을 드디어 정상적으로(?) 굴리는 으른이 된 기분에 도취되어 처음으로 청약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무순위 청약을 넣보았다. 될 거라는 생각이 전혀 없이 단지 연습 삼아해 본 건데, 오늘 아침 당첨 확인을 해보니 맙소사, 당첨이다.


아니 청약 당첨이 로또라며?? 하늘의 별따기라며?? 3대가 덕을 쌓아야 될 수 있다며??


더군다나 미계약분 줍줍이고 경쟁률은 30:1이나 되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제야 아파트 위치를 확인해보니 소래포구 근처다. 소래포구라니. ㅋㅋㅋ


소래포구에서 회사까지 지하철 경로를 검색해보았더니 무려 4번을 갈아타고, 1시간 반이 넘게 걸린다. 출퇴근은 미친짓이군.


 요새 한창 결혼을 앞두고 청약 스터디에 열을 올리고 있는 나의 청약봇, 친구 A에게 물어봤다. LTV인지 TGV인지가 40%에 계약금만 내면 6개월 뒤에 분양권 전매를 할 수 있으니 일단 사보라며, 카카오맵 로드뷰까지 봐가며 입지 분석을 해준다. 어머 아주 복부인이 다 됐다 애가. 분양권에 ''를 받고 팔 수 있단다.


피? 피가 한 1억쯤 되나, 나도 이제 졸부가 되는 건가?하고 잠시 두근두근 했지만 인천 소래포구 아파트에 피가 1억이나 붙지는 않는다는 걸 금세 깨닫고 시무룩해졌다.


아파트는 오션뷰지만 내가 당첨된 호수는 저층이고, 앞엔 유흥시설이 많아 '어쩌면 내집'에서 보는 뷰는 모텔뷰 또는 횟집뷰 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어쨌든 일단 계약금을 마련할 생각에 점심시간엔 점심도 거르고 치과에 갔다가 은행까지 달려가서 마통 한도를 문의했다. 지금 주식에 넣은 돈까지 탈탈 털면 계약금은 일단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은행에 다녀오는 길은 배도 고프고 치료받은 잇몸도 머리도 터질 것 같았다.


오후엔 일하다 틈틈이 혹시 분양권 전매가 안될 경우 내가 이걸 전세나 월세를 주면 어떨까 싶어 주변 아파트 전월세 시세를 알아봤다. 나쁘진 않지만, 이번 부동산 대책에 실거주 요건 어쩌고 이런 게 있었던 것 같다. 부동산 대책 내용을 찬찬히 살펴본다. 뭔 소린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계약에 인감증명서와 인감이 필요하다는데 집 어디선가 굴러다니던 도장이 더 이상 어딨는지도 모르겠고, 5월까지 분양권 전매가 안되면 그 이후론 양도세만 80퍼라는 얘기에 '피'가 그 정도를 상쇄할 만큼 붙을지를 상상하느라 머리가 쪼개져버릴 것 같았다.


내일 인천까지 가서 계약을 하려면 반차라도 내야 하는데, 연가를 하도 물쓰듯 써버렸더니 반차도 아껴 써야 하고 소래포구까진 어떻게 갈 것인지 생각하니 아찔했다.


식구들 단톡에 동생(인천 소재 대학 재학 중)을 붙잡고 내가 계약할 테니 군대에 있는 남자 친구 동훈이랑 결혼해서 너네가 매수하고 들어가 살라고, 동훈이 대출 얼마나 땡길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사정하다가 엄마에게 "미쳤어 드디어" 한마디를 듣고 포기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태우며 그 동네 부동산에 6군데나 전화를 해보았다. 결론은 "피 받고 팔 생각이면 비추. 버리세요 그냥."이라는 답이었다.


내심 바라던 답이 나와 기쁜 마음에 담배를 비벼 끄고 한층 가볍게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각종 청약과정, 분양권 전매, 아파트 도면, 카카오맵, 부동산 시세 등으로 어지러운 인터넷 탭을 한 번에 닫아버렸다.


친구들이 아파트 청약됐다는 사람은 주변에서 처음 본다고, 어떻게 한번에 그 줍줍이 되지? 하고 난리를 치니 괜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 갑자기 집주인 마인드가 되어버렸던 반나절이 그렇게 끝나고 나니, 별안간 웃음이 나왔다.


실제로 며칠 전 양키캔들 정품 사기도 돈 아까워서 쿠팡에서 가품이 분명한 저렴 버전을 주문했는데, 정말 말 그대로 양초 하나 살 처지도 안되는 주제에 달빛을 가지겠다고 반나절동안 발악을 하고있었다 ㅋㅋㅋㅋ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해요. 나중에 서울로 다시 해봐야겠다. 그리고 아마 나의 올해 운은 이 쓰잘데기없었던 당첨에 다 써버린 것 같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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