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단골 치과가 있는데, 세어보니 인생의 절반을 다녔다. 나는 개원한 지 얼마 안 된 치과의 초창기 교정 환자였고, 담당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교에 가고, 취업해 외국에서 일하다 온 모든 과정을 지켜보셨다. 나를 기억하고 있다기보다는, 차트에 적어놓은 기록을 보고 나를 떠올리는 것이겠지만 치과에 갈 때마다 선생님은 나를 늘 환하게 반겨주셨다. 그래서 나는 치과 가는 걸 무척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다.
원장 2명으로 시작한 이 치과는 이제 원장이 10명 가까이 될 정도로 규모가 제법 커졌다. 한국에 돌아와 오랜만에 검진을 받고 나서 달력을 하나 받았는데, 새로 합류한 한 원장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중학교 동창이었다. 같은 반이었던 적은 없고 복도를 지나가며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던 건너 건너 아는 사이. 굳이 호, 불호로 따지자면 호에 해당했던 친구였는데, 언젠가 이 치과에서 마주칠 생각을 하니 뭔가 께름칙했다. 소름 끼치게 싫은 건 아니지만, 어지간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정도. 그래서인지 작년에 스케일링을 다른 데서 받았다.
이 감정은 어디서 온 걸까? 여러 가설을 세워봤다.
하나, 나와 같은 학교에 진학한, 내가 불편해하는 다른 동창과 친한 사이라서. 이 다른 동창과는 여러모로 결이 맞지 않았는데, 나는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모두와 원만한 교우관계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두 동창은 꽤나 가까웠던 사이로 기억하는데, 치과의사가 된 동창을 보면 자동반사적으로 그 아이가 떠올라 피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둘, 질투가 나서. 나와 같은 선에서 출발했다고 여겨왔던 사람이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직업을 갖고 있는 게 부러운 걸까. 허나 이 가설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반례가 있다. 대학교 친구 중에 치과의사가 하나 있는데, 개원 후 돈을 잘 버는지 아주 비싼 차를 끌고 다닌다. 그 차를 얻어 타도 이 친구에게는 전혀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 맛있는 거 많이 사줘서 좋은데 힛.
셋, 치과도 개인정보를 공유하는 의료기관이다 보니 아는 사람을 마주치기가부담스러울 가능성. 민감한 정보를 노출해야 하는 병원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곤혹스럽다. 치과의사-환자라는 위계에서 오는 불편함도 있을 테지. 그러나 산부인과에서 누군가를 마주쳤을 때와 안과에서 누군가를 마주쳤을 때 느끼는 불편함의 밀도 차이를 안다면 치과쯤이야?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원칙이 하나 있다. 길에서 우연히 초등학교건, 대학교건 동창을 만나 인사를 한다면, 상대에게 연락처를 물어보고 식사를 하자고 한다.이렇게 만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깔려있다. 그런데 그 동창과 일정 시간 이상 대화를 해보면 '아, 이래서 우리가 가깝게 지내지 않았구나' 깨닫는다. 그리고 그날의 만남은 일회성에 그치게된다.
만약 치과의사 동창과 대화를 트면 같이 밥을 먹게 될 가능성이 있고, 그 경우 내가 좋지않은 감정을 품은 동창에게 내 이야기가 전해질까 싶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일어나더라도 극히 가능성이 낮은 일을 걱정한다는 건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우습다. 아니면 초록이 동색이라는 편견에 떠밀려 일단 모른 척하고 싶은 심산일 수도. 물론 이 모든게 쓰잘머리 없는 뇌내 망상일지 모르겠다.
'세렌디피티'라는 말을 좋아한다. 여러 해석이 있지만 '행운을 가져다준 뜻밖의 우연'으로 이해하고 있다. 내가 동창과의 우연한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 우연이 행운까지는 아니어도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주길 바라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어떤 우연은 반갑지만은 않아서, 내가 그동안 믿어온 신념을 뒤흔들어놓고, 나를 사색의 뫼비우스 띠 위에 올려놨나 보다. 그럼에도, 앞으로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만난다면 나는 어김없이 밥을 먹자고 하겠지. 세렌디피티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