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다음 여정지는 이곳이 아니었다. 처음 스리랑카 여행 경로를 짤 때 나의 이동 순서는 ‘콜롬보-담불라-캔디-하푸탈레-미리사-갈레-네곰보’였는데, 미리사로 떠나기 전날 가이드북을 읽다 보니 점점 미리사가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미리사의 키워드를 꼽자면 서핑, 갈레의 키워드를 꼽자면 역사다. 좀 더 끌리는 건 후자. 그래서 미리사로 가는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갈레로 가기로 했다.
하푸탈레에서 갈레로 가는 방법은 버스다. 가는 시간은 무려 7시간이고, 두 번을 갈아타야 한다. 기차를 타는 건 걱정이 되지 않는데 버스를 타는 건 여행 경험이 쌓여도 늘 긴장하게 된다. 거기다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니!
당시에 인터넷 서핑을 해봐도 루트가 나오지 않아서 숙소 주인에게 물어본 후 기록해뒀던 이동 경로. 하푸탈레에서 반다라웰라 행 버스를 타고, 반다라웰라에서 마타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탄 후, 마타라에서 갈레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갈레는 발음도 잘 해야하는데 현지에선 ‘골’이나 ‘갈’ 정도에 가까운 발음이다.
도착한 후 짐 풀자마자 밥 먹고 나니 어둑어둑. 그래도 작은 마을이니까 산책만 한 바퀴 하기로 한다. 마을 길이 원형으로 되어있어서 정말 한 바퀴를 돌면 대략의 산책은 가능하다.
항구 도시 갈레는 크게 항구 밖과 안으로 구역을 나눌 수 있는데, 기차나 버스를 타는 곳을 빼고 대부분의 숙박시설과 여행자 저격 레스토랑은 항구 안에 자리하고 있다. 다음날 산책을 하다 유심 카드를 추가구입하기 위해 항구 밖으로 꽤 걸어나갔는데, 그곳은 바쁘고 번잡해서 항구 안과는 전연 다른 분위기였다.
늦여름과 초가을이 만나는 계절이라서인지, 바닷가라서인지 밤이 되니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게 산책하기 딱 좋다. 다만 가로등이 너무 적어서 숙소로 가는 길이 무서운 것만 빼면.
차가 느리게 움직이고 사람도 여유롭게 걸어다니는 길 가장자리는 계단을 올라야만 갈 수 있도록 턱이 만들어져 있다.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하려는 것인지 그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이 턱 때문에 처음 갈레에 도착했을 땐 바다와 맞닿은 산책로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몇 개의 계단만 오르면 인도양이 바로 옆에 자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바닷가를 산책하고 나면 그 다음은 골목골목을 돌아보는 일.
론리 플래닛의 갈레 챕터에서도 딱히 추천하는 이렇다 할 일정은 없다. 그저 등대를 출발지 겸 도착지 삼아 마을을 천천히 걸어보라고 권유한다.
이곳은 스리랑카의 다른 도시에 비해 유럽풍의 건물이 많다. 바다를 끼고 있어 더 외국인들의 유입이 잦았던 탓일까. 다른 도시에서는 홍차를 마실 때나 느낄 수 있었던, 서구의 지배권 아래 있던 나라라는 사실이 이곳에선 걸음 걸음마다 느껴진다. 오래된 흔적이 가득한 작지만 고풍스러운 교회와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아름답다. 이제는 관광지로의 역할을 하는 아픈 역사다.
이 마을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이곳은 스리랑카의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꽤 유명하다고 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연남동이나 성수동, 혹은 서촌 같은 느낌이려나. 골목을 기웃대다 보면 작지만 자기만의 개성 담긴 물건이 가득한 디자이너 개인 샵이나 여러 브랜드의 물건을 센스 있게 디스플레이 해둔 편집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시아 지역 야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과 달리 질이 좋고, 한국 물건과 비교해도 절대 세련됨이 뒤쳐지지 않는 감각적인 아이템이 많다. 배낭여행자만 아니라면 몇 개 쟁여 오고 싶을 정도. 고민을 하다가 결국 알록달록한 색의 에코백을 구입하고 만다. 여행 시작부터 갖고 다니던 에코백이 너무 낡았기에 그건 버리고 이곳에서 구입한 것으로 대체하기로 한다.
아침부터 일몰까지 예쁘지 않은 구석이 없는 항구 마을. 느긋하게, 그러나 공들여 찬찬히 이곳을 돌아보길 권한다. 그러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여기 참 예술하기 좋겠어' 하는 생각이 든다.
스리랑카 여행을 시작할 때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일지 시계 방향으로 움직일지 고민을 했었는데, 시계 방향을 선택한 것이 내겐 하루하루 지날수록 여행의 만족감을 더해준 선택이었다. 마음이 지쳐 평온한 풍경을 먼저 만나고 싶다면 바다와 가까운 도시들을 먼저 방문하는 반시계 방향, 거대한 역사의 흔적들과 광활한 차밭을 먼저 만나고 싶다면 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이 조금 더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어떤 방향으로 돌든 그게 뭐가 중요하랴. 당신이 가기로 마음 먹었다면 언제가 됐든 만날 것일진데. 사람과 사람 사이 뿐만 아니라 여행의 여정에도 마음이 닿는 연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니, 계획과 달라지더라도, 시간이 좀 더 걸릴지라도 서두르지 말고 걸음이 닿는대로 그 연을 만들어가기를 진심으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