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적지 않게 한 내게 사람들이 많이 묻는 질문 중 하나.
“여행 다녀본 곳 중 어디가 제일 좋아?”
나는 이 질문에 섣불리 어디 한 곳을 딱 짚어 이야기하기가 꺼려진다. 그들은 내 기호를 묻는 것이니 질문자의 취향이 다르고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여기는 이래서 좋았고 저기는 저래서 좋았다는 이유들이 다 있기에 “거 참, 답하기 힘들구먼”의 자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에서는 가장 좋았던 곳을 꼽을 수가 있다. 바로 치앙마이. 결국 치앙마이에 더 머물기 위해 한 달 반의 여정으로 시작한 내 배낭여행을 두 달의 여정으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3주 간 치앙마이에 머물며 처음으로 여행지에서 ‘나를 알아보는 단골 식당’을 만들었고, ‘휴식을 취하는 사원’이 생겼고, ‘자주 가는 노점 식당’을 얻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대화들. “안녕, 넌 어느 나라에서 왔어?” “난 두 달 동안 여행해” “내가 가본 여기가 정말 좋아”의 여행 중심적 대화가 아닌, 그밖의 주제여서 더 기억에 남았던 대화와 순간을 되새겨 본다.
도이 수텝 가는 썽태우에서 만난 청년과의 대화
치앙마이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한 곳, 도이 수텝. 시내 중심가와 거리가 있는 이곳엘 가려면 ‘레드 트럭’이라 부르는 공용 트럭택시인 썽태우를 타야 한다. 썽태우는 지나가는 것을 택시처럼 붙잡아 타는 게 보통인데, 도이 수텝으로 향하는 썽태우는 정류장이 따로 있다. 10명을 꽉 채워야만 도이 수텝행 썽태우는 출발을 한다. 물론 돈을 더 주면 적은 인원으로도 출발이 가능하지만 대부분 여행자들은 언제 채워질지 모르는 다음 승객을 기다린다. 그러다 보니 함께 인내의 시간을 보내는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만난 이스라엘 청년과 그날 밤 재즈바에서 나눈 이야기.
- 얼굴만 보고 사람들의 국적을 가늠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빠이에서 부탄-이태리 커플, 그리고 미국인 청년과 함께 어울렸을 때 ‘친절한 인종차별도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었는데, 이렇게 이 주제를 빨리 다시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 나는 내 얼굴만 보고 ‘니하오’, ‘곤니치와’ 라는 인사를 건네는 일도 일종의 레이시즘이라고 생각해. 그냥 ‘넌 어느 나라 사람이야?’라고 물어봐주는 건 안 될까.
- 맞아. 나도 여러 번 느낀 일이야. 심지어 사람들은 내가 이스라엘에서 왔다고 하면 ‘넌 이스라엘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어’라고 한단 말야. 그럴때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야?
이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옆자리에 새로 온 남자가 우리의 국적을 묻고, 그 친구에게 ‘넌 이스라엘 사람처럼 안 보이는데?’라고 한건 우연의 일치이자 진정한 킬링 파트.
어쨌든 이 친구는 러시아 사람처럼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고, 난데없이 러시아어 공격을 받을 때도 있다고 한다. 나도 종종 중국어와 일본어 공격에 ‘난 한국인이야’ 라고 답하면 ‘넌 한국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어’ 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도대체 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대신 내 국적을 모호하게 만드는 시도를 하는 걸까.
왓 쩨디 루앙에서의 스님과의 대화
왓쩨디루앙은 치앙마이 올드타운에 자리한 사원이다. 치앙마이에 머물며 이곳은 세 번 다녀왔는데, 두 번째 방문은 앞서 등장한 이스라엘 청년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사원의 한쪽 편에는 천막을 쳐두고 휴식처처럼 자리를 마련한 곳이 있는데, 사실 지나치기 쉬운 이 공간은 ‘스님과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정확히는 아직 정식 스님이 되지는 않은 수행자들과의 대화. 이 대화의 경험이 무척 좋았다는 이스라엘 청년의 추천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천착해 온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욕심을 덜어내는 법, 내 안의 평화를 찾는 법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한 시간 여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1:1로 대화를 시작했고 이후엔 미국인 가족 여행객이 오는 관계로 모두가 어울려 토론하듯 대화를 했다. 이 중 가장 인상깊었던 <화를 내지 않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옮겨본다.
-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있어?
- 화가 난다면 일단 심호흡을 하고 그 화가 다시 사라질 때까지 내버려 두면 돼. 아무 생각하지 않고 기다리는 거야.
- 그 방법은 효과적이지만 큰 문제가 있어. 사실 내가 화가 나는 건 나 자신만의 문제라기보다 다른 사람과의 트러블 때문인 경우가 많거든. 그래서 심호흡을 하고 "곧 괜찮아진다, 화내지 말자" 이렇게 생각해. 근데 그 사람이 와서 다시 화를 돋우는 거야!
- 내가 한 가지 우화를 이야기해줄게. 어느 동물 마을에 힘이 센 사자가 있었어. 그 사자는 그 마을의 왕이었지. 그런데 어느 날 사자가 개 한마릴 만났어. 개는 사자에 비하면 힘이 없는 동물이니까 평소 같으면 사자는 그 개를 거들떠도 안 봤을 거야. 근데 그 개는 조금 달라. 미친 개거든. 그래서 자꾸 사자를 약올리는 바람에 사자는 그 개를 보면 힘을 쓰고 싶어져. 하지만 사자가 개를 제압해버리는 게 맞는 걸까? 잘 생각해봐. 왜 그래야 하지? 개는 그저 개일 뿐인데, 그리고 그건 심지어 미친 개야.
- 그 말인 즉슨 나는 사자고 상대는...
- 그렇지.
Sociable에 대한 생각
치앙마이를 찾는 외국인들의 독보적인 사랑을 받는 재즈 펍, 노스 게이트. 이곳에 일주일 정도 매일 출석 도장을 찍다가 너무한건가 싶어 다른 바와 클럽도 다녀봤지만 난 여기가 제일 좋았다. 님만해민의 세련된 디제잉 클럽은 내 취향이 아니고, 나한텐 올드타운 노스 게이트나 루츠 락 레게 구역의 거리에서 춤춰대는 그 세련되지 않음이 더 힙했다.
여느 때처럼 또 노스 게이트에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매해 11월이면 오래된 친구들과 치앙마이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한 프랑스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근처에 있다는 그의 친구들과도 함께 어울리게 됐다. 친구들이라기에 한 2~3명 되는 줄 알았는데 9명 씩이나.. 거기다 또 합석에 합석을 거듭하며 금세 불어나 버린 인원들.
아마 세월과 언어의 장벽을 느낀 건 나뿐만은 아니었을 거다. 새로이 끼어든 사람들 중엔 나처럼 적당히 어울리는 정도에서 그쳐야 하는 사람도 있었고, sociable로 표현할 수 있는 이들도 있었는데, 나의 모습과 또 반대되는 모습의 양상을 수 시간 동안 지켜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여러 국가의 사람들이 한데 어울리는데 외지인의 감정을 가장 뚜렷하게 느끼는 일이었다. 메인 그룹은 친절했지만 그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친절함이었고, 결론은 난 sociable person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걸 그닥 선호하지 않는다는 걸 혼행 10년 차에, 많은 사람들을 거친 후에야 깨달았다.
돌이켜 보면 혼자만 있어선 절대 알 수 없었던 것들이다.
결국 나는 관계에 얽혀 살아간다는 걸 무심결에 깨닫게 된 여행이다.
그동안 꾸준히 혼자 여행을 해왔지만, 때론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고독을 지킨 적도 있지만, 누군가와 꼭 많은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나는 끊임없이 관계를 탐색하고 고민해 왔다. 앞으로도 수없이 거칠 보통의 시간과 다가올 여행에서도 나는 나의 관계와, 나와 사람의 관계를, 나와 풍경의 관계를, 그리고 수많은 것들과 세상과 나의 관계를 더 덤덤히 관찰해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