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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탕국 Sep 08. 2019

어떻게 죽을 것인가

<우아한 죽음>, <내가 죽는 날에는>


웰 다잉. 몇 년 전부터 꽤나 눈에 띄는 키워드다. 이제 우린 잘 사는 것만 고민할 게 아니라 잘 죽는 법도 고민한다. 그렇다면 어떤 죽음에 대해 우린 ‘잘 죽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잠든 상태에서 조용히 숨이 끊어지거나, 이제 죽는 일 말곤 더 이상 생에 해야 할 이렇다 할 큰일이 없을 정도로 노쇠했을 때 죽음을 맞거나 혹은 큰 병이나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할 때 우린 흔히 호상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사고를 당하거나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 죽으면 그건 웰 다잉이 아닌 걸까? 아니, 애초에 죽음을 ‘잘’이라는 부사와 엮어도 되는 걸까?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지만 코앞에 오기 전까진 아무도 실감하지 못하는 일. 온갖 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절대 풀리지 않을 미스터리. 바로 나의 죽음.

그것을 깊게 고민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우아한 죽음>, 그리고 <내가 죽는 날에는>을 소개한다.



[우아한 죽음. The good death. 2018]

1944년 생 자넷은 2016년 9월에 죽기로 한다. 근위축증으로 인해 삶이 무너진 지 오래고, 이 병은 치료법도 없어서 상황은 악화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는 똑같은 병을 앓다 생을 마감한 엄마를 기억한다. 엄마는 거동이 불편해지자 그때부터 죽는 날까지 30년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자넷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안락사. 하지만 영국에선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기에, 그는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직접 스위스에 가 죽기로 한다.


다큐멘터리는 자넷이 죽기까지의 두 달을 기록했다. 가족과 친구, 이웃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살던 집을 처리하는 일, 스위스의 안락사 담당의와 연락을 하고, 날이 다가와 스위스로 가기 위해 짐을 싸는 순간들이 차분하게 나열된다. 그 사이사이 집을 찾아온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는, 보조기구를 이용해 힘겹게 걸으며 입으로 아침 신문을 옮기는 자넷의 일상이 있다. 그가 가꾼 아름다운 정원과 아늑한 침실도 보인다. 자넷은 죽음을 준비하는 한편 삶도 살아낸다. 그 시간의 흐름을 가만히 좇다 보면 죽음은 어디 멀리에 있는 게 아니라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안락사 하루 전, 아들 딸과 대화하는 자넷 / 이미지 출처: <우아한 죽음>


스위스의 병원에 도착한 이후 자넷의 모습도 이전 모습만큼 충실히 시간을 할애한 덕에 우린 담당의 에리카가 왜 예전과 달리 안락사의 필요를 인정하게 됐는지, 어떤 약물을 사용해 안락사를 진행하는지, 안락사를 선택한 사람들은 병원에 도착한 후 어떤 과정들을 거치는지, 그리고 자넷이 죽기 전날 아들 딸과 대화하는 모습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이쯤 되니 어디까지 보여줄지 궁금하기도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영상은 자넷의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 다 담는다. 스스로 약물을 투입하고 평온함과 두려움이 혼재된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 자넷, 그리고 그 곁을 지키며 끊임없이 엄마의 머리를 쓸어 넘기는 딸. 화면은 곧 전면이 검정으로 전환되고, 담당의 에리카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어머니는 사망했습니다”.


죽음을 단 며칠 앞두고 자넷은 그런 말을 했다. 죽음 이후가 어떨지 궁금해요. 내 존재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내가 죽는 날에는. 2019]

1987년 생, 서른 세 살, 로스쿨생, 마지막 학기, 그리고 암 환자. 영균은 공익인권변호사를 꿈꾸며 공부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2014년 대장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암은 하루가 다르게 퍼져 가고 학교에 돌아갈 거란 기대는 점점 작아지는 시점에, 영균은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철학, 죽을 때까지 읽기’라는 독서 모임을 꾸린다. 남들보다 많이 해왔고 잘한다고 자신한 일이 책 읽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통증이 심해지고 숨이 가빠오는 중에도 제 몸과 정신이 가능한 때까지 독서모임을 이어간다. 사람들은 말했다. 몸이 그 지경인데 왜 그렇게 그 모임을 해야 하느냐고. 영균은 답했다. 몸이 이 지경이라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오히려 몸이 이 지경이니까 더 하고 싶을 수도 있지 않나?

사랑하는, 고마운 사람들을 위한 ‘영균이 드리는 저녁 한 끼’ / 이미지 출처: MBC스페셜 <내가 죽는 날에는>


어쩌면 그동안 미뤄왔을 일들을 영균은 하나씩 해 나간다. 남들이 볼 때 뿌듯할 수 있도록 멋지게 차려입고 엄마와 여행 가기, 장례식에서 의미 없는 사진이 쓰이지 않도록 미리 영정 사진 찍기,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초대해 밥 한 끼 대접하기. 내가 떠나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간직하길 바라며 하나씩 즐거운 일을 해 나가는 중에도, 삶은 멀어지고 죽음은 가까워 온다.


5개월 간의 기록을 보면 나도 모르게 경건해진다. 죽음이 성큼 다가온 걸 알면서도 끝끝내 열심히 살기를 멈추지 않는 모습은 누군가에겐 안타까움을 줄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겐 자기반성을 할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사실 우린 그의 삶과 죽음을 보며 내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 몇 개월을 살았을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영균을 추모하는 추모회 / 이미지 출처: MBC스페셜 <내가 죽는 날에는>


아마도 자신의 생애 마지막 크리스마스일 거라고 짐작하며,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인사를 남기던 영균의 한 마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 고마워요.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없을 뻔했는데. 그 막막함에 죽어갈 수도 있었는데.



얼마 전 읽은 완화의료 전문가가 쓴 죽음에 대한 책엔, 사람들이 ‘좋은 죽음’을 흔히 ‘가족들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평온하게 눈을 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적혀 있었다. 결국 우린 죽는 순간에도 내 품위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아니 이제 나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남들에게 기억될 나의 마지막이 비통하지 않기를. 그것이 아마 우리 생의 마지막 소원일 것이다.


자넷은 몸이 더 망가지기 전에 안락사를 택했고, 영균은 혹시 의식이 없을 때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받는 일을 차단하기 위해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했다. 그것이 어떤 마음일지 죽음이 현실로 느껴지기 전까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죽었든 그들 모두는 존엄했음을, 남은 이들이 기억하는 모습은 그 사람의 죽음이 아닌 삶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우린 웰 다잉을 위해 결국 웰 리빙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도 어디엔가 곁에 있을 죽음을 모른 척하며 영상을 시청하는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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