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한 패배자들>
10년 전 이런 유행어가 있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유행어를 만든 개그맨은 이 말을 발악하듯 매주 꼬박 1년을 외쳤고, 우리는 TV를 보며 깔깔 웃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 명제는 바뀌었을까?
올해 초까지 대히트를 친 드라마 <스카이캐슬>엔 공부 1등에 집착해 시험 문제를 유출하거나 대형병원 의사인 아버지의 병원에서 체험활동 경력을 쌓는 등 편법을 일삼는 사람들이 나온다. 작가는 실제 아이를 키우며 본인이 보고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작품을 쓰게 됐다고 했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올림픽에서의 메달 획득을 목표로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도 마다하지 않는 스포츠 선수들은 어떤가. 금메달을 딴 선수에 대해선 온갖 언론에서 그의 경기 장면은 물론이고 인생사까지 되풀이하는 반면, 메달을 따지 못하면 관심 밖이다.
<승리한 패배자들>은 승패가 더욱 분명한 스포츠계에서 패자로 기록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진짜 행복은 이기고 지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권투, 피겨스케이팅, 농구, 골프 등 다양한 스포츠에 도전한 이들의 이야기는 때론 웃기고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결국 소소한 감동을 자아낸다. 그렇다고 “졌지만 잘 싸웠다” “패배에서 인생을 배운다” 같은 다소 낯간지러운 메시지를 건네진 않으니 부담 갖지 말고 보시길.
다큐는 총 8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는데, 각 에피소드는 2~30분 정도 길이다. 아버지의 강요에 가까운 권유로 링에 오른 권투 챔피언 마이클 벤트, 영국 소도시의 만년 꼴찌 축구팀 토키 유나이티드, 흑인 피겨스케이터 수리야 보날리, 캐나다의 전설적인 컬링 팀을 결성한 팻 라이언, 닷새 동안 240km를 달리는 사막 마라톤에 참가한 마우로, 개 썰매 대회에 출전한 엘리, 길거리 농구스타 잭 라이언, 프랑스 골퍼 장 방 드 벨드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들은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KO패를 당하기도 했고, 만년 패배자지만 단 한 번 승리를 맛보기도 했으며, 기존의 엘리트 스포츠계엔 적응하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도 했고, 우승을 목전에 두고 황당한 사건들이 잇따라 경기에서 지는 바람에 불운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즉 승자이기도 패자이기도, 또 승자이면서 패자이기도, 패자이면서 승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원제인 <LOSERS>보다 번역된 제목인 <승리한 패배자들>이 더욱 그 미묘함을 담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프랑스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수리야 보날리는 유럽 선수권에서의 눈부신 성과와는 달리 올림픽 메달은 목에 걸지 못했다. 여자 선수 최초로 쿼드러플 토룹을 성공시킬 정도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가진 선수였지만, 흐트러짐 없는 기술을 수 차례 선보여도 결과는 늘 세계선수권 최고 성적 2위에 그쳤다. 그가 고난도의 기술을 더해 실수 없이 경기를 마쳐도 금메달은 그보다 적은 기술을 선보인 백인 선수에게 돌아갔다. 수리야는 “내가 백인이었다면 더 많은 점수와 지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당시 심사위원들은 그의 다소 공격적인 기술 구사와 더불어 외모나 의상 같은 외적 요소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하기만 하면 금메달을 걸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심사위원의 눈에 들기 위한 연기를 펼쳐왔던 수리야. 하지만 1994년 일본 치바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는 역시나 실수 없이 완벽한 연기를 선보인 그가 아닌 홈그라운드 선수에게 1위를 선사했고, 급기야 수리야는 포디움을 거부하고 메달을 벗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사실상 마지막 올림픽인 1998년 나가노 올림픽에 출전해 금지된 기술인 백플립을 구사하고, 그로 인해 큰 감점을 받아 10위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 날 경기에선 수리야에게 환호가 쏟아졌으며, 그 역시 “백플립은 심사위원이 아닌 관중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선수 은퇴 후, 수리야는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이젠 자신을 심사하는 눈이 없으니 하고 싶은 기술을 넣어 하고 싶은 구성대로 맘껏 스케이트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알아주는 농구 실력을 가진 잭 라이언은 놀랄 만한 슈팅으로 수 차례 농구계의 러브콜을 받았다. 문제는 불 같은 성격과 유흥 탐닉. 문제아로 낙인찍혀 고등학교도 이곳저곳 전전해야 했던 그는 농구 실력 하나로 대학에 입학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역시 여자와 술, 불성실함, 성격 등의 이유로 잘리는 일이 반복됐다. (그 와중에 이 학교에서 잘리면 저 학교로, 저 학교에서 또 잘리면 쩌~ 학교에서 불러주는 어마무시한 실력의 소유자.) 온갖 문제를 다 일으키는 잭에게 정해진 스케줄을 철저히 따르며 훈련을 하는 건 영 맞지 않는 일. 결국 그는 프로 농구가 아닌 길거리 농구를 택했다.
길거리 농구는 주로 흑인들의 영역이었는데 잭은 백인이라는 핸디캡 (그 세계에서 백인은 분명한 단점이다)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실력으로 단숨에 길거리 농구의 제왕으로 등극했다. 이곳저곳 시합을 다니며 뉴욕의 길거리 농구팀을 제압하던 그를 눈여겨본 농구 전문 칼럼니스트는 그를 한 프로농구팀에 소개하기에 이르고, NBA에 진출하면 수많은 돈을 벌 수 있단 생각에 입단을 했다. 하지만 이번엔 훈련을 하다 부상을 입는 잭.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부모에게 빌붙어 살던 그는 좌절했고, 이젠 더 이상 어떤 기회도 없을 것 같던 그때, 그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농구공을 손가락 끝으로 돌리는 재주를 가진 그에게 농구 묘기팀 입단 제안이 들어온 것. 그리고 그는 수없이 연습을 하며 농구 묘기를 익히고, 새 인생을 찾는다.
이처럼 <승리한 패배자들>에는 스포츠 역사에선 패배자로 기록됐을지라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 스포츠의 진정한 즐거움을 찾은, 그래서 자신만의 승리한 스포츠 인생을 설계한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들은 1등을 했을 때보다 KO패를 당한 후 더 권투를 즐길 수 있게 됐다고 하고 (마이클 벤트), 1등을 하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 운동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고 하며 (수리야 보날리), 3년 만에 재기해 연승을 거뒀지만 승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관중들이 컬링을 보는 재미를 잃게 한 게 후회된다고 하고 (팻 라이언), 연이은 불운으로 우승을 눈앞에서 놓쳤지만 스포츠의 진정한 의미는 1등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장 방 드 벨드) 말한다.
1등을 하지 못해서, 혹은 스포츠계에 남을 대단한 선수로 기억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loser(패배자)라 부를 수 있을까. 설령 세상이 이들을 패배자라 부른다 한들 그들 스스로 그 말에 위축이나 될까. <승리한 패배자들>은 앞선 두 질문에 자신 있게 No를 외친다. 세상이 뭐라 부른 들 어떠한가. 잘못된 건 없으니 부끄러울 일도 아닌데, 그저 즐거운 일을 할 뿐인데 말이다. 그래서 이건, 지금 이 시대까지 지속되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루저로 규정되는 이들이, 그 명제를 보기 좋게 비웃으며 뜻깊은 승리를 이루고 주고받는 하이파이브 그 자체다.
덧) 메달권 진입을 하지 못하고 만년 4등만 맴도는 수영선수 준호가 1등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결국 메달을 목에 건 후의 이야기까지 보여주는 영화 <4등>도 같은 맥락에서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