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리스트>
2015년, 쇼팽 콩쿠르 결선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날이 생각난다. 세계 최고 권위의 콩쿠르 중 하나인 쇼팽 콩쿠르는 결선 과정을 전 세계에 생중계하는데, 아직 파릇파릇한 나이의 연주자들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무대에 오르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펄떡거렸더랬다. 얼마나 떨릴까, 엄청 연습을 많이 했겠지, 하며 지켜보다 미스터치라도 내면 어찌나 안타깝던지. 연주자와 아무 관련도 없는 나조차도 지켜보기만 해도 떨리는데, 당사자는 어떻겠는가.
특히 그 조마조마함은 연주자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모습을 생중계할 때 증폭되기 마련이다. 쇼팽 콩쿠르라면 5년에 한 번, 차이콥스키라면 4년에 한 번 개최되니 이번에 사활을 걸겠단 맘으로 이 무대를 준비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참 짓궂게도 그 과정이 어떤지를 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음악가들은 어떻게 콩쿠르를 준비하는 걸까. 국제적 명성의 음악 콩쿠르에 출전하는 이들에겐 어떤 특별함이 있을까.
신예 연주자들이 제 청춘의 일부를 기꺼이 쏟아붓는 열정의 시간들, 그 단면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파이널리스트>를 소개한다.
2015년 벨기에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바이올린 결선 진출자들의 이야기다. 세계적 권위의 콩쿠르에 참가한 이들 중 여러 번의 심사를 거쳐 최종 명단에 오른 12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은 이제 주최 측이 제공하는 한 건물에서 대회 리허설이 이뤄지는 날까지 합숙을 한다. 합숙소 정원을 산책할 수는 있지만 대문 밖으로 나가는 건 금지된다. TV, 컴퓨터, 태블릿, 휴대폰 등 모든 전자기기도 사용할 수 없다. 또한 이들은 대회를 위해 본인이 준비한 자유곡과 주최 측이 정한 지정곡을 하나씩 연주해야 하는데, 합숙소에 들어온 시점에야 지정곡을 공개한다. 즉, 앞으로 8일 동안 해당곡을 자신의 자유곡과 함께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시작부터 엄청난 부담감이 밀려온다. 연주자들은 악보를 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한 연주자가 말한다. 이건 불가능해요. 연주가 불가능한 악보라고요.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상태에서 이제 연주자들은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은 지정곡 연주가 마음처럼 되지 않자 우울감을 느낀다. 특히 여성 연주자이기 때문에 체력 조절도 만만치 않다. 남자 연주자들은 곡이 어렵다곤 할지언정 팔이나 어깨가 아프단 이야기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연주자도 생소한 스타일의 지정곡에 진이 빠지긴 마찬가지다. 악보를 빽빽이 채울 정도로 몰아치는 템포도 소화하면서 곡 해석도 같이 해내야 한다. 수십 번 반복해 듣고 연습하며 그 길을 찾아내기 위해 애쓴다.
시간이 흐르며 그들은 서로 어떻게 연습하고 있는지, 자신이 이해한 지정곡은 어떤지 자유롭게 의견을 나눈다. 함께 연습하며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도 한다. 고작 1주일에 하루를 더한 시간인 8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악기와 연주자만이 오롯이 남겨진 공간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치열하게 음악에 파고드는 일뿐이다.
12명의 파이널리스트가 자신의 인생과 음악적 가치관 등에 대해 주최 측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도 종종 비치는데, 이 시공간이 단지 콩쿠르 준비만을 위한 게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인생과 음악적 가치관을 곱씹어볼 수 있는 기회라는 걸 보여준다. 특히 한국인 파이널리스트인 이지윤과 임지영이 산책하며 나누는 이야기가 인상 깊다. 어릴 때부터 내로라하는 커리어를 쌓아가며 이 자리에까지 온 두 사람. 앞길이 걱정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도 진로 앞에선 고민이 많은, 남들과 다를 것 없는 20대 청춘이다.
- 지윤: 솔리스트가 꿈이야?
- 지영: 솔리스트 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막 연주하고 다니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외로울 것 같아요.
- 지윤: 전혀 안 행복하댔어. 내가 보기에도 그렇지 않아. 그리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살기에도 어려워.
- 지영: 맞아요. 여기서 입상한다고 쳐도 이렇게 콩쿠르 입상하는 사람만 한 해에 몇십 명인데...
이지윤은 한 인터뷰에서 언젠가 페스티벌에서 아주 유명한 연주자의 공연을 봤는데, 그날 밤 그를 바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얘기한다. 무대에선 한없이 빛나던, 수많은 이의 박수갈채를 받던 그 사람이 바에선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앉아있는 게 슬펐다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펼치는 화려한 삶 뒤엔, 그 많은 공간 중에 정 붙일 장소나 사람은 없는 솔리스트의 외로움이 있었던 거다.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이제 콩쿠르에 출전하는 날들도 지나고, 계속해오던 학업도 끝을 맺으면 정말 홀로서기를 해야 할 텐데 고민이 많다. 그리고 고민을 한 끝에 결정한다 해도 내 뜻에 맞는 길을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그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결전의 날이 임박해 온다.
결선은 며칠에 걸쳐 이뤄지는데, 그걸 하루하루 착실하게 담지는 않았다. <파이널리스트>의 묘미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합숙소에서 12인의 결선 진출자가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고뇌를 통해 자신만의 음악 색을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대 뒤에 대기하며 심호흡을 크게 하는 연주자, 평소보다 덤덤한 표정으로 무대에 나가길 기다리는 연주자의 모습이 그간 합숙소에서 보인 이들의 모습과 겹쳐지며 이 콩쿠르가 단지 실력 경연대회에 그치는 게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우승자를 발표하는데, 주최 측은 한국인인 임지영과 이지윤의 이름을 혼동해 우승자인 임지영이 아닌 이지윤을 호명하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감격에 북받쳐 울음을 삼키던 이지윤은 다시 대기실로 돌아오는데, 그 후 인터뷰에서 그는 말한다. 제가 무대에 잘못 올라가긴 했지만 처음 5초 정도는 너무 기뻤어요. 정말 우승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중요한 건 최선을 다했다는 거니까요. 이 대회를 통해 배운 게 정말 많아요.
사실 이 다큐멘터리는 만듦새가 훌륭하다고 하기엔 아쉬운 지점들이 있다. 일단, 12인의 파이널리스트의 이야기를 담는다는 소개글과는 달리 몇 명의 바이올리니스트 이야기만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이는 연주자들이 가장 예민할 때 촬영해야 했으니 일부는 촬영을 원치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해석으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 다큐멘터리의 한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이지윤의 이야기에 너무 깊이 빠져 인물 간 형평성을 잃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끝내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카메라에 모습을 비추는 것도 개의치 않은 듯하고, 인터뷰도 솔직하게 응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엔딩까지 이지윤만의 멘트와 원샷으로 마무리했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다른 연주자들의 감회도 함께 담았다면 그 빈자리가 조금은 작게 느껴졌을 것이다. 또한, 결선 연주를 하는 모습도 지나치게 적게 들어간 게 아쉽다. 결과보단 과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의도는 읽히지만, 8일간 치열하게 고민하고 심지어 고통스러워했던 지정곡을 어떻게 연주해내는지, 혹은 그 연주가 끝난 직후 그들의 표정을 인터뷰와 함께 보여주었다면 합숙소에서의 준비 과정이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 세계 최고 권위의 콩쿠르의 최종 결선 진출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이들도, 자신의 일과 인생에 있어선 평범한 청춘이란 면을 부각한 건 이 작품의 가장 빛나는 결실이다. 사실 엄청난 대회의 대단한 연주자들인 만큼 경쟁 심리와 그 미묘한 긴장감으로 구성을 하는 방법도 매력적이었을 텐데 말이다. ‘젊은 음악가들의 초상’으로 그들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 순간의 재미는 덜할 지라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면임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덧) 가장 많이 출연한 이지윤의 행보가 궁금해 찾아보았다. 그는 2년 전, 세계적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이 이끄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 부악장으로 지원했지만, 그 실력이 출중해 종신 악장에 임명됐다. 동양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이뤄낸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