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램 1호와의 첫 만남
그렇게 LCD와 배터리는 해결했지만 홀과 나사를 없애는 문제는 난항을 겪고 있었다. 인텔의 CPU는 열이 많이 나기 때문에 공기가 순환되지 않으면 온도가 올라가서 동작이 멈추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나는 이 문제 역시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공기 순환 구멍은 없애야만 한다고 밀어붙였다. 이쯤 되자 개발팀에서 디자인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이렇게 디자인해 놓으면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는 도저히 생산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는 얘기다. 사업부장인 내게는 말할 수 없으니 디자이너에게 화풀이한 모양이다.
그렇게 답답한 국면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노트북의 화면과 키보드가 연결돼 있는 힌지(hinge) 부분에 공기 순환 홀을 만들면 시야에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정말 훌륭한 아이디어였다. 그렇게 노트북 밑면에서 홀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정말이지 밀어붙이고 또 밀어붙여서 얻어낸 결과였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서 나온 아이디어인 것이다.
이렇게 선택과 집중을 통해 시제품을 만들아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동작하는 시제품이 나오는 날을 맞이했다. 나는 시제품과 만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여의도 트윈빌딩의 15층 회의실에서 그램과 처음 만난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건 세상에 없는 제품이라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노트북이 동작하는 순간 가슴이 마구 뛰었다.
9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화면이 켜지자 마치 새 생명을 본 듯 감동이 밀려왔다. 내 딸이 세상에 나왔을 때 본 것 처럼 그램 시제품을 본 순간 전율을 느꼈다. 우리가 해낸 것이다. 그날 퇴근해서 마포대교를 지날 때 내 가슴에선 뜨거운 것이 올라왔고 희열을 느꼈다. 이것이 출시되면 세상을 한번 바꾸겠구나 하는 예감이 밀려왔다. LG의 PC사업도 반등할 거라는 기대가 솟았다. 그동안 많은 제품을 개발했고 다양한 도전도 해왔지만 그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