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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현 Aug 18. 2024

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의 장점

글쓰기에 슬럼프가 찾아오는 날도 있었다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면

  운이 점점 나빠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나는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미얀마’로 해외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현재는 정치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나라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이런 나라가 있었는지 문화는 어떤지 정보가 전혀 없었다. 그런 미지의 나라에 간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멋진 일이었다.


  봉사단원으로 선발된 인원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었다. 면접을 볼 때 심사위원의 말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있었다.

  “우리는 마을을 바꾸러 갈 거예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국제개발협력단으로서 파견될 예정이었다. 나는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책으로 쓰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그래서 마법진이 그려진 표지의 일기장에 국내 훈련의 과정을 모두 기록해 두었다. 주로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일기장이 내 내면을 오히려 파괴하게 만들지는 꿈에도 몰랐다.


  당시 내 성격은 참으로 변덕스러웠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써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쓸 때 현실의 기억이 뒤바뀌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허구의 장소를 만들어 냈다. 거짓된 상상과 현실의 내용이 헷갈리는 일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게 일기에 적어두었다. 그러면 나는 두 가지를 모두 기억해야 했는데 하나는 내가 집필하고 있는 원고의 내용이고 하나는 내가 느낀 감정이었다. 나는 현실에서 느낀 감정을 토대로 아름답고 교훈이 넘실거리는 동화를 썼다. 여기서 ‘동화’는 ‘알레고리’다. 알레고리란 추상적인 생각이나 개념을 인간이나 동물로 바꿔 말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방법을 쓰게 된 이유는 내 일기가 미얀마에서 중간에 도둑맞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일기를 주운 이에게 내가 다음에 사용할 전략과 방식이 해석되지 않도록 암호화 장치를 걸어둘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당시 나는 팀원 중 한 명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너 일기라도 훔쳐서 읽고 싶어.”

  라고 하더니 언제는 내가 없을 때 정말 내 일기를 읽었던 것 같다. 그 아이는 읽었다고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일기를 썼으면 책임을 쳐야지.”

  나는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다. 일기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 내가 느낀 감정이 나에게 불리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삶은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찰나의 생각일 뿐이었고 이것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가공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담 없이 쓴 글이었다. 그런데 그는 내가 마지막으로 쓴 일기의 구절을 내가 지나갈 때마다 외쳤다.

  ‘당도했다.’

  그 구절이 하필이면 ‘당도했다’였다. 그의 마음에 당도했다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팀원들에게 그 말을 유행시켰다. 그래서 내가 소파에 앉으면, 당도했구나! 하고 외치고 내가 마요네즈를 짜서 먹으려고 하면, 당도했구나! 하는 식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였다. 내가 쓴 글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다른 이에게 먹잇감을 제공하는 꼴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 일로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이더라? 모든 것이 다 부질없어졌다.


  하지만 그 후에도 나는 일기를 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내 깊고 변덕스러운 내면세계를 말로써는 공감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쓰고 또 써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소설을 쓰려고 하는 이유였다. 나는 소설에 내가 겪었던 일에 은유와 비유라는 암호를 걸어두었다. 그 암호는 너무 단순해 보여서 쉽게 읽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알아차리는 독자가 나타나게 되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상투적인 표현’이라는 직관적인 암호를 걸어두었다. 나만이 쓸 수 있는 멋들어진 표현을 써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비유는 적절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 많은 사람이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지도 않았다. 내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 거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내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면 수정해보려고 한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나는 예술고등학교에서의 훈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상황 속에 완전히 굴복해 버렸을 것이다. 대학시절 교수님이 한 말이 떠올랐다.

  “생존하지 못한 작가는 생존한 작가의 말을 쓸 수 없고 생존한 작가는 생존하지 못한 작가의 말을 쓸 수 없다.”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생존에 대한 욕구가 큰 나로서는 뇌리에 깊게 박힌 서글픈 말이 되었다. 미얀마에 가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었을 때 처음 외로움을 배웠다.


때로는 홀로 설 수 없는 것도

글을 쓰는 이유가 되어주니

얼마나 넓은 마음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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