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보다 소중한 너의 태도.

- 결과 앞에서 흔들리는 딸에게.

by 점빵 뿅원장

(시험지 이미지는 구글 검색을 통해 얻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지난주에 딸아이의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났다. 한 달 가까운 시험 준비를 했고, 아이 나름대로 참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하루하루 시험을 볼 때마다 전화를 해서 알려주는 결과에 대한 소식에 많이 기뻤다.


하지만 시험 성적 정정 기간이 되면서 아이는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들으면 참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할 점수였지만 아이는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했었고 늘 성실하게 수업을 들었었기에 그 실망도 더 큰 것 같았다. 예를 들자면 수업 시간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거나, 다른 공부를 해서 사실상 혼자만 수업을 듣고 있는 어떤 과목의 경우는 시험 전 주까지는 선생님께서 '문제를 어렵게 낸다, 수업 중에 나왔던 내용의 구석구석에서 낸다'라고 하다가 정작 시험 일주일 전에는 사실상 시험 문제지와 다르지 않은 인쇄물을 주면서 '여기서 다 낸다'는 말을 하고 실제 시험도 그렇게 나왔다는 것이다. 덕분에 딸아이 혼자서 수업을 듣던 그 과목에서 누군가는 수업 한 번도 듣지 않고 좋은 점수를, 딸아이는 (의미는 같지만) 시험지와 똑같은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점이 되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 본인이 머리가 나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속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이번 학기에도 꼭 받고 싶은 종합우수상을 못 받을 것만 같아 마음이 더 초조해진 것 같았다.


아빠는 네가 그런 거 안 받아도 괜찮다고,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주요 과목이 아니라고 수업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그냥 두는 선생님이나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의 문제라고, 시험 문제를 인쇄물 한 장 주고 똑같이 내는 선생님과 학교의 문제라고, 그저 지금의 결과가 억울하고 속상할 수 있겠지만 너의 성실한 태도는 누구보다 소중한 거라고, 언젠가는 삶에 대한 그런 태도의 차이가 너를 빛나게 만들 거라는 말을 해주지만 결과를 보여주고 싶은 아이의 마음에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거기다 한 마디 덧붙이는 '학교를 다니다 보면 그렇게 공부 안 해도 잘하는 애들이 있고, 그런 아이들은 이기기 힘들다'는 엄마의 냉정한 말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의 마음을 더 상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 역시도 그 말을 들으며 인정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어젯밤에도 잠자리에 들려는 아이를 방까지 데려다주는데, 아이가 같은 반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친구의 이야기를 하면서 말했다. "XX 이는 수업도 안 듣고, 맨날 잠만 자고 떠드는데 성적이 잘 나온다"며 속이 상한다는 말을 했다. 늘 하던 말을 또 해주기는 뭣해서 "아빠 중 2 때 OOO, 중 3 때 XXX, 고 1 때 ㅁㅁㅁ, 고 2 때 △△△이 나랑 비슷한 성적이었는데 걔네는 맨날 자거나 수업 안 듣다가 시험 때 다른 애들 노트 빌려서 시험 공부해서 아빠보다 잘 보거나 비슷하거나 그랬어. 공대 다닐 때도 교수님이 준 프린트만 달달 외워서 시험 보는 애들이 많았는데, 원서로 된 교과서까지 다 읽고 들어간 나보다 성적 잘 나오는 애들도 많았어. 아빠도 되게 억울했다?! 아빠는 그 두꺼운 원서 200 페이지씩 다 읽어보고, 어떤 원리였는지 이해하고, 다른 애들이 물어보면 답도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고, 뭔가 논리적으로 안 맞는 부분도 찾아서 교수님한테 질문하기도 했었는데 시험 성적은 생각보다 안 나오더라고. 내가 머리가 나쁜가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어. 결국 원인은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도 있고, 시험 볼 때 전략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아. 그래도 아쉽지는 않은 게 아빠가 공부한 깊이가 걔들보다 얕거나 부족하지 않은 건 자신 있거든. 즐겁게 공부했고, 깊이 이해했고, 그래서 지금도 우리 딸이 물어보면 나름 나쁘지 않은 답을 주거나, 다른 분야랑 연결해서 설명해 줄 수 있잖아. 예시도 잘 들어줄 수 있고. 원서 자세히 읽다 보면 구석구석에 관련된 예시나 실험 같은 것도 많이 나오거든. 다른 애들은 그런 거 모르는데 아빠는 책을 읽어봐서 그런 거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도 너는 아빠나 엄마가 공부하는 것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게 더 많으니까 낫지 않을까? 이제 니 머릿속에서 XX 이는 잊어. 네 경쟁상대는 XX이가 아니라 결국 너 자신이니까. 그리고 네가 공부를 잘하는 건 아빠에게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아빠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너 스스로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거야. 그건 진짜로 아빠의 자부심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 말 좀 잘 들어, 짜식아. 하하."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의 얼굴에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결국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에 농담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급하게 마무리했다. 학창 시절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해서 무한 삽질과 헛발질을 하면서 빙빙 돌아왔었던 내가 겪던 어려움을 내 아이는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나 크다. 하지만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아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나에게 손을 내밀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과목들은 아이가 기대한 만큼 잘 나오면 좋겠다. 이왕이면 노력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고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면 좋겠다. 그리고 혹시 그러지 못하더라도 아이가 했던 노력이 가치 있는 것임을, 삶에 대한 본인의 태도가 올바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좋겠다. 사랑스럽고 고마운 딸이 갑자기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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