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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 Apr 25. 2024

조금 차분해진 아이

 고모와 함께 살았던 집은 언제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어린 내 입장에서 굉장히 좋았다. 하지만 그 집은 어린아이가 살기에는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집 바로 앞에 8차선 도로가 있었고 집 뒤에는 여러 공사장비가 뒹굴어 다니는 마당이 있었다. 실제로 뒷마당에서 자전거 타다 넘어졌는데 손에 유리가 박혀 병원에 가서 뺐던 일처럼 일련의 안전사고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결국 우리는 평범한 빌라로 이사를 갔다.   


 평범한 빌라는 기찻길 옆에 있었는데 방 세 개와 적당한 크기의 거실이 있었다. 나는 9살이 되고 처음으로 나의 방을 가지게 되었다. 내 방을 가졌지만 아직 혼자 자는 게 무서웠던 나는 매일 밤 아빠 옆 엄마 옆 언니 옆을 돌아가면서 잤었다. 집은 넓어졌지만 그 어떤 곳에 정착하지 않고, 그날 기분에 따라 아무데서나 잤던 거 같다. 부모님은 나에게 잘 장소를 정해줬던 거 같은데 별 소용은 없었다. 나는 사람이 잘 수 있는 곳이라 느끼면 어떤 곳이든 잠들었다. 그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웃기게도 아빠의 가랑이 사이였다. 엄마는 아빠의 오른쪽을 담당했고 언니는 아빠의 왼쪽을 담당하니 나는 경쟁에 항상 밀려 아빠 가랑이에서 누워있게 되었다. 그 당시 키웠던 강아지 마저 그 경쟁에 끼는 날에는 아빠 머리 위에 자리 잡았다. 아빠는 집안의 온 생명체가 자신을 뒤덮고 있는 게 귀찮고 피곤한 듯이 이야기했지만 어린 눈으로 봤을 때 아빠는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 빌라에서 엄마는 가정 경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일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엄마가 일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빠와의 다툼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전까지 우리가 안 보이는 곳에서 싸웠나 싶을 정도로 자주 싸우셨다. 아빠는 엄마가 일하는 곳의 사람들이 정말 싫었다고 했다. 엄마가 그간 하지 않았던 행동들이 그 회사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반면 엄마는 아빠의 음주를 극도로 꺼려했다. 아빠는 폭음을 하지 않지만 음주 횟수가 굉장히 많긴 했었다. 두 분의 사이가 안 좋아지면 안 좋아질수록 엄마는 소리를 자주 높였고 아빠는 음주가 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엄마와 아빠의 관계가 소홀해졌다고 나와 언니가 방치되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하게 부모님은 꽤나 자주 싸웠지만 그것과는 별게로 그 당시 나는 내 몸이 꽉꽉 찬 사랑으로 가득 차서 흘러내린다고 생각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 당시에도 부모님은 자주 싸웠지만 내 마음속에 엄마와 아빠는 나를 위해 뭐든지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 마음속 명제 같은 믿음이 있었는데 부모님의 행복은 나로 완성된다는 믿음이었다. 그런 믿음을 가지면서도 '왜 부모님은 나를 위해 싸움을 멈추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못했다. 나는 그 어린 시절 어떤 방식으로 부모 사이의 관계를 독립적으로 보고 나와 부모만의 관계만 집중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 시절에는 부모님이 싸우더라도 엄마와 아빠가 떨어져 지낼 것이란 것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 같다. 싸우더라도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 가족이라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부모님이 이혼할 수 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10살, 그 나이에는 나는 그 감정이 뭔지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그건 배신감이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퇴근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꽤나 많은 학원을 다녔다. 집에 도착하면 엄마는 매끼 따뜻한 밥으로 우리를 맞이했고 밥 먹고 나서는 아빠가 내 숙제로 나왔던 패러글라이딩을 같이 만들어 주셨다. 그 당시 아빠의 사업이 나름 안정되기 시작한 시점이라 아빠는 주말에도 시간이 완전히 나기 시작했다. 봄이면 동네에서 가장 큰 공원으로 놀러 가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엄마는 잔뜩 싸 온 김밥과 과일을 날랐다. 나름 온 가족이 바지런하게 사는 삶이었다. 바지런하게 일하고 그 중간중간 부모님은 바지런하게 싸웠다. 그러다 이듬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외갓집은 내가 살던 도시에서 꽤나 멀었기 때문에 나는 심적으로 친가를 매우 좋아했고 실제로 방학에는 이주정도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들어가 함께 지낼 정도였다. 엄마도 방학이 되면 기꺼이 자식을 맡길 정도로 시댁을 의지하였고, 아빠는 육 남매 중 막둥이로 큰 사랑을 받아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우리 가족은 심적으로 굉장히 괴로웠다. 나와 언니는 처음으로 이별이라는 것을 겪었고, 부모님 또한 그 이별의 빈자리를 꽤나 힘들어했다. 아빠는 그 시점에 새로운 결심을 하셨다. 바로 새로운 아파트를 하나 분양받고, 그 집에는 우리 네 가족과 남편을 잃은 할머니까지 5명이 삶을 꾸리는 것이다.

  

 부모님의 다음 갈등은 흔하디 흔한 주제였다. 어린 자식 둘과 거동이 불편한 노모 그리고 워킹맘이었던 우리 엄마. 할머니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는 시점부터 엄마는 내가 봤을 때도 굉장히 괴로워 보였다. 신축 아파트는 그 당시 엄마에게 더 이상 기쁨이 아니었고 늘 사랑스러웠던 아이들이 엄마 눈에는 수행해야 할 어떤 일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엄마는 더 이상 그 신축 아파트가 싫다고 했다. 그 시절에 엄마가 집을 나가겠다고 한 순간 나는 이 상황을 방치하는 아빠가 미웠고 우리를 두고 가겠다는 말을 하는 엄마가 미웠다. 하루는 엄마가 아빠에게 왜 막내인 당신이 노모도 보살피고 제사도 지내느냐고 따졌다. 베란다에 홀로 울고 있는 엄마를 보는데 나는 엄마가 베란다에서 떨어질 것처럼 너무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결국 자식들이 다 장성한 첫째 큰 아빠 집으로 할머니를 보냈다. 하지만 엄마는 할머니를 보내고 나서 미안한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었고 아빠 또한 그런 엄마에게 원망을 했다. 나는 그 시기에 정말로 엄마랑 아빠랑 이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항상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감정 표현이 솔직하다 못해 감정이 격한 아이였는데 이 시점으로 조금 차분해진 아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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