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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 Apr 25. 2024

행복으로 바꾸는 마법

 서른이 되어서 부모의 이혼을 보는 것이 힘든 일인지 몰랐다. 나이를 먹었으니까 당연히 괜찮을 줄 알았던 것은 내 오만이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종종 다투는 부모님을 보는 것이 싫어서 "그럴 거면 이혼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싸움이 심해지는 날이면 가끔씩 입 밖으로도 그 말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부모의 이혼을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세상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30살이 넘은 어른이고 직장도 있고 심지어 결혼도 해서 나의 가정까지 이루었다. 그럼에도 부모의 이혼은 내 마음을 어지럽고 때로는 힘들게 만들었다. 그때 나는 나 스스로 나이는 먹었지만 부모에게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내가 기억하는 부모의 다툼에 대한 첫 기억은 6살 아니면 7살쯤이었다. 너무 오래전 기억이라 간헐적으로 생각이 나지만 그날의 장면이 사진처럼 남아있다. 1990대 후반쯤 국민임대 아파트에 살 때의 기억이다. 방 하나, 화장실 하나, 크지 않은 거실, 거실에 붙어있는 주방, 조그마한 베란다가 있는 집이었다. 그날은 부모님이 크게 다투었는지 전화기가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고 다른 여러 생활용품들이 집안 곳곳에 누워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현대미술의 오브제 마냥 여기저기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흩뿌려있는 느낌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었던 것 같다. 아마도 우리 부모님이 싸우는 게 어린아이의 관점으로 비현실적이어서 그런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친구랑 놀다가 집에 들어갔는데 집 상황을 보고 어렸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집 풍경은 이렇게 생생한데 부모님의 모습과 감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나는 부모님을 말리지도 않고 바로 집을 나가 다른 친구집에 갔었을까? 아니면 부모님이 아직 어린 나를 집 밖으로 보냈을까?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그 집에서 그렇다고 좋은 기억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 집에서의 가장 강렬한 기억은 널브러진 전화기쯤 된다. 아마도 우리 부모님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깊은 갈등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다. 일명 "자식 때문에 산다"라는 말의 시작점인 듯하다.


 그날의 다툼이 잘 아물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집은 이사를 갔다. 그 집은 고모와 함께 사는 주택형식의 집이었다. 쌍둥이처럼 생긴 집 형태로 고모집은 왼쪽 집으로 방 두 개, 거실 하나가 있었고 우리 집은 오른쪽 집으로 방 하나, 거실 하나의 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상적인 집이 아닌 거 같다. 고모가 바로 옆집에서 살아서인지 부모님은 자주 싸우지 않았다. 결혼한 현재 나의 관점으로 봤을 때 엄마에게는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그 시점, 엄마가 임신을 했었다. 나는 동생이 생긴다는 기쁨에 친구들에게 자랑도 많이 했었다. 어린 마음에 동생 이름은 내가 지어주겠다며 언니와 내 이름을 조합하고 아빠와 엄마 이름까지 다 써가면 조합했었다. 태아 초음파 사진을 흔들며 방실방실 웃던 게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이가 유산이 되었고 가족 내에서 나름 힘든 시기였지만 아이러니하게 우리 가족은 아니 우리 부모님은 꽤나 사이좋게 지내셨다. 


 우리 가족은 아주 어릴 때부터 매주 여행을 다녔다. 아빠는 매 주말마다 우리를 태우고 일을 다니셨는데 지방 곳곳의 맛있는 음식을 사주셨다. 아빠가 타던 산타페 트렁크에 난 항상 벌러덩 누워있었고 엄마는 아빠 옆에 앉아 동네의 도는 한 소문을 조잘조잘 이야기했었다. 언니는 항상 멀미를 했기 때문에 창백한 얼굴로 휴게소 좀 들리자며 투덜거렸다. 그 시점에는 아빠가 일하는 방식은 건 당 돈을 받는 형식으로 일을 했는데 나는 아빠에게 한번 일 할 때 얼마를 받는지 물어봤고 아빠는 건당 3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그날 일한 건을 총 3건, 내 계산으로 아빠는 그날 9만 원을 벌었다. 같은 날 장어를 먹으러 갔는데 정신없이 장어를 먹는 와중에 식사값이 9만 원에 가까워지자 나는 불안해졌다. 결국 그날 식사값은 9만 원을 넘었고, 나는 잘 먹고 있는 언니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부모님은 크게 웃으면서 더 먹어도 된다면서 추가로 음식을 더 시키셨다. 머리가 커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빠는 건당 받는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언니는 나보다 조금 머리가 큰 상태여서 부모님의 장난을 알아차렸지만 나는 그것도 모른 채 꽤나 오랫동안 아빠가 퇴근하면 몇 건 일했는지 물어봤었다. 


 그 당시엔 이런 일처럼 어려서 알지 못했던 사실이 꽤 있었거 같다. 가령 내가 몸이 허하다면서 먹었던 한약은 아이를 잃은 엄마를 위해 한약을 지었던 것의 사은품 또는 따라오는 상품이었다던지, 아이를 잃었지만 슬픔을 숨기고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일상을 아이와 나누는 엄마와 아빠가 매주 다니던 여행은 가장의 책임으로 돈을 벌어야 하지만 주말을 함께 보내고 싶은 가장의 마음이었다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마냥 행복할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그 모든 걸 부모님께서 행복으로 바꿔주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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