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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 Apr 25. 2024

집에 맞지 않는 장롱

 더 이상 우리 가족은 신축아파트에서 행복하지 못했다. 할머니를 큰집에 보낸 건 아빠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고 이것은 엄마와의 불화로 이어졌다. 나름 신도시의 신축 아파트였지만 그 집은 우리 가족에게 행복한 집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사를 결정했다. 다음 집은 고깃집이 딸린 집이었다. 엄마는 이사를 결심하면서 그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고깃집을 열었다. 1층은 새로 열게 된 엄마의 고깃집, 2층은 우리의 가정집이었다. 엄마가 일했던 회사는 가구회사였다. 엄마가 신축 아파트로 이사 갈 때 가구회사에서는 커다란 장롱을 하나 짜주었는데 새로 이사한 집은 그 장롱을 넣을만한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2층 한편에 있는 가벽에 어정쩡하게 장롱이 자리 잡았다. 그 앞으로는 방 두 개와 화장실 하나가 자리 잡아서 이상하지만 나름 집 같은 형태였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아는 일반적인 가정집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널따란 공간에 있는 장롱을 반드시 지나쳐야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장사는 꽤나 잘됐고 부모님은 바빠졌다. 예전처럼 자주 여행은 가지 못했다. 아니 아예 가지 못했다. 그 당시 밥장사는 휴일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교하면 엄마는 항상 집에 있었고 내가 엄마를 필요할 때는 언제나 언니와 나에게 시간을 할애했다. 예를 들면 학습지나 학원 문제집 한 면을 정답으로 꽉 채웠을 때 나는 지체하지 않고 숙제검사라는 명목으로 엄마를 찾아 보여줬다. 엄마는 크게 웃으면서 언제 그렇게 배웠냐고 신기하다며 네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똑똑하다고 해주셨다. 하루는 진도 4 이상의 지진이 일어났었는데 나는 우당탕 아래로 내려가 엄마한테 무섭다며 칭얼거리면서 엄마의 시간이 가져갔다. 아무 일도 아니지만 내가 닳을 수 있는 곳에 항상 엄마가 있어 행복했다. 장사를 시작하는 초에는 엄마도 꽤나 행복해 보였다. 없는 시간이지만 아빠 생일에는 잠을 줄여서 아빠를 생일상을 차렸다. 나는 아빠 생일상에 올라오는 매작과를 와그작와그작 씹으면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었다.


 말이 밥장사라 휴일 없이 일한 다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점심부터 자정까지 매일 일하는 삶은 꽤나 고단했을 것이다. 엄마는 그 때문에 서서히 지쳐갔을까 싶다. 엄마가 열심히 일한 덕분에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핸드폰을 가질 수 있었다. 어느 날은 하굣길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은 학교 끝나고 친구집에서 좀 더 놀다 오라는 전화였다. 나는 늘 친구랑 놀다가 늦게 집에 갔기 때문에 그 전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소와 똑같이 친구와 늦게까지 놀았다. 근데 집에 들어가 보니 부모님의 가게가 닫혀있었다. 이상한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이층으로 향하자 티브이가 틀어진 채로 아빠는 멍하게 있으셨다. 늦게까지 놀다 와서 인지 배가 고파서 아빠에게 어린양을 부리며 배고프다 했다.      


 아빠는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봤고 나는 아무거나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아빠는 나를 따라 배시시 웃으면 남아있는 국을 끓였다. 어디서 사 왔는지 모르는 삼각김밥을 꺼내셨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의점 삼각김밥을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맛에 나는 신이 났고 너무 맛있고 신기하다며 좋아했었다. 나중에 생각하면 아니었지만 나는 그 삼각김밥에 대한 기억을 꽤나 재밌고 좋은 추억으로 생각했었다. 우리는 그렇게 며칠 동안 저녁으로 삼각김밥을 먹었다. 우리 아빠는 식사에 국이나 찌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 국+삼각김밥, 찌개+삼각김밥의 조합으로 밥을 먹었는데 나는 그 부분이 재미있었다. 다만 '왜 집에 엄마는 없고 삼각김밥만 있을까'라는 생각은 했다. 엄마가 보고 싶긴 했는데 엄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가 우리 자매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보여주지 않으려 꽤나 용쓰셨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없는 날이 늘어나자 언니는 굉장히 불안해하기 시작했고 며칠이 지나 엄마는 돌아왔다. 엄마의 짧은 가출은 일주일 정도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장사를 시작하고 엄마의 첫 휴가쯤 될 것이다. 그게 행복하고 기쁘진 않았을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엄마가 돌아오고 다시 일상을 평온하게 살 때쯤 아빠에게 또 연락이 왔다. 집에 천천히 오라고, 나는 이전 경험으로 뭔가를 학습했기 때문에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크게 울고 있었고 아빠는 고함을 치고 있었다.  부모의 싸움은 자녀에게 생존의 위협이라는데 나는 그 말을 전적으로 동감한다. 왜냐면 나는 그때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말보다 그냥 내가 먼지가 되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날 싸움의 끝은 괴로운 마음에 술을 마신 엄마가 혼절하면서 끝이 났다. 엄마는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는데 나는 그 말을 다 알아들을 수가 있어 꽤나 괴로웠다. 술 때문에 뭉개진 발음과 뒤죽박죽인 언어 그럼에도 나는 엄마가 그날 한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엄마가 내게 한 말은 내가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되는 비밀이구나를 깨닫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밀이라는 것을 배웠다. 내가 생각하는 비밀을 지키는 방법 중 최고는 잊어버리는 것이다. 현재 나는 그날 엄마가 이야기한 비밀의 절반을 잊어버렸다. 아쉽게도 나는 비밀을 지키는 단계 중 절반만 성공했다.


 다음 날 엄마는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을 못 했기 때문에 나는 알아서 모른 척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싸움은 모른 척할 수가 없었는데 엄마와 아빠는 서로 대화하지 않았으며 방도 따로 쓰셨다. 서로 투명인간 취급하며 살고 있는데 살아지는 게 신기했다. 그래도 투명인간 취급하고 사는 게 나쁘지 않았다. 서로를 그냥 인간 취급을 하면 싸움이 나기 때문이다. 이런 긴장감이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결국 다시 터져버렸는데 그날은 내가 왜 부모님이 싸우게 되었는지까지 알아버렸다. 


 엄마의 가출 사유는 아빠 입장에서는 외도였고, 엄마의 입장에서는 외도가 아니며 삶의 고단함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가구회사의 지인 이야기까지 나왔다. 나는 그래서 방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되는 그 장롱이 너무 싫었다. 저 장롱은 이 집에 맞지도 않는데 꾸역꾸역 들어와서 우리를 괴롭히나. 그냥 우리가 신축 아파트에서 이사 올 때 버렸어야 했다. 그전 아파트에서 불행이 이번 집까지 따라오는 걸까? 아빠와 엄마는 수없는 싸움을 통해 그때의 일은 외도가 아니었으면 엄마가 단순히 삶으로부터 도망간 일쯤으로 합의했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그냥 부모님이 살았으니까. 2차로 이어진 '자식 때문에 산다'일 수도? 그래서 그런가 보다고 추측할 뿐. 그렇게 우리 집은 한동안 고깃집을 접었고 그 집에서 3년을 못 채우고 다시 이사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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