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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찬 Feb 16. 2023

연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이라는 책을 읽은 지 3달이 넘은 것 같지만 글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작품을 이해하고 글을 쓰는 입장임에도 작품을 이해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만큼 깊이 생각을 했고 책을 이해하려 배경지식을 채우다 3달이 지나버렸다. 아직까지도 조세희 작가가 말하려는 바를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글을 쓰며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난쏘공> 연작은 단편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그리는 소설이다. 각 단편마다 화자가 바뀐다. 이렇게 계속해서 바뀌는 이유는 같은 현상도 시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첫 장면에 등장하는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수학 교사가 들려준 두 명의 굴뚝 청소부 이야기가 이를 뒷받침해 주며 각 계층 사람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계층을 정리해 보면, 한쪽에는 난장이를 비롯한 빈민층이 있다. 여기서 난장이는 정상인과 같이 살 수 없는 대립적 존재로 묘사된다. 이러한 빈민층과 더 나은 계층인 대학원생 지섭과 주부 신애, 재벌 가문인 경훈과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바뀌기를 바라는 윤호와 은희가 있다. 이러한 계층들의 이야기를 그러내는 조세희는 계층의 편을 갈라 한쪽을 추악하게 그리지 않았음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비참해지고 부유한 사람들은 탐욕스러워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부유층인 윤호의 이야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어머니를 일찍 여읜 채 애정이 결핍되어 살아가던 윤호는 그의 가정교사이기도 한 지섭이 난장이의 가족 이야기를 해줬을 때 사회의 부조리를 느끼며 함께 놀던 부유층 아이들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모습을 작 중에서 보인다. 그러나 깨끗한 마음씨를 가진 은희란 여자아이를 만나며 좋아하게 되는데, 대입시험이 끝나고 집에서 은희를 만난 윤호가 자살하려는 마음을 버린 장면이 생생히 떠오른다. 잃어버렸던 사랑을 찾은 것이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건 사랑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전에 나왔던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라는 문장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칼날]에서 주부 신애는 "우리 모두 난장이예요"라고 말한다. 이는 관계가 단절되고 연대의 정신이 없다시피 한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느껴졌다. 사회의 억압과 그로부터의 단절로 인해 이들은 영수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말한 것처럼 천국에 살며 지옥을 생각하지 않는 부유층들과 달리 지옥에서 살며 하루하루 천국을 생각하며 삶을 버텨낸다. 필자는 영수라는 인물에 대해 들여다볼 것이다. 영수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지옥과 천국처럼 단절적으로 보고 있으며 세계를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 투쟁하려 한다. 더 이어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행복과 사랑이라 생각하며 책을 읽고 우주로의 이주, 즉 현실 도피를 하게 되지만 이런 시공간적 초월은 불가능하기에 이런 사실에 절망하며 현실에 발붙일 수도 없는 인물이 만들어졌다. 영호를 대상으로 던진 "형은 이상주의자야"라는 말에서의 이상주의자는 현실과 싸우며 그 현실을 바꾸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닌 '죽은 땅'에서 낙오돼 세계를 부정하고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이상)에서 삶의 희망을 찾으려는 사람을 칭하는 말로 보인다. 영수는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 그나마 영수는 교회와 노조를 이용해  노동자들의 의식을 바꾸려 노력하기도 하며 폭탄을 만들어 재벌 총수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취소하는 등의 이성적 면도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영수가 살고 있는 땅은 죽은 땅이기에 이러한 실천은 의미가 퇴색되었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 영수가 "우리는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살았다."라고 단정 짓는 장면에서는 아련한 분위기에서 현실과 환상이 교차했다.


난장이의  첫째 아들인 영호는 대학생 지섭에게 "나는 도도새다."라는 말을 듣고 근사하다고 생각하는데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지섭은 빈민 노동자에게 연민을 품고 그들을 위해 싸우는 지식인이다. 알다시피 도도새는 인간의 미개지 훼손으로 180년 만에 멸종한 새이며 날개가 없어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해 사회적 힘이 없는 처지로 투쟁하는 지섭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였다고 생각한다. 맞서지 않는다면 도도새처럼 멸종하고 말 것이니 말이다. 도도새는 날개를 사용할 줄 몰랐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도도새는 날지 못했다. 그래서 인간에 의해 멸종되었고 이는 곧 인간의 잔인성을 보여준다. 그 대상이 도도새가 아닌 같은 인간이라 하더라도  무자비한 인간들에게 대들기 위해 사회적 힘이 없는 도도새들은 투쟁한다.


이런 세상에서 법은 그들에게 있어 하등 쓸모가 없다. 첫 장면인 판자촌 철거 소동은 이런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판자촌을 철거하며 주민들에게는 아파트 입주권이 주어지지만 아파트에 갈 돈이 없어 판자촌에 온 사람들을 대신해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와서 돈을 번다. 그들은 법을 강조하며 이럴 때의 법은 기득권자를 위한 도구로 쓰인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는 난장이의 말이 처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뫼비우스의 띠]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여기서는 그 누구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걸 볼 수 있다. '수학 교사', '노동자', '제군', '꼽추, 앉은뱅이' 등등 인물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만이 드러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독자가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걸 바탕으로 해 서로의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고 연대해 함께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는 수학 교사의 말은 공부의 목적으로 보인다. 자신이 얻은 지식을 자기,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하이데거- 숲길 中), 즉 진리가 실현될 수 있게 봉사하는 것에 쓰여야 한다는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고 개인의 이익을 위한 실용적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돌아와 굴뚝 청소 노동자들은 서로의 다르지 않음을 인식해서 함께 씻어야 하며, '제군'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에 비추어 현실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사회를 진단하고 연대해 대안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수학 교사의 입을 빌려 '제군'인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제군'인 우리들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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