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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찬 Mar 12. 2023

학생은 무엇을 배워야 하나

학교는 바뀌어야 한다. 

자본주의.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를 일컫는 말이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낳괴', '자본주의의 노예' 같은 말을 만들어 냈는데, 이는 우리 스스로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간다 인식하는 것을 드러내는 듯하다. 자본주의에서의 자본, 다시 말해 돈이 우선시 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 사실 당연하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려면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져야 하는데,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경쟁을 하고 낙오자가 생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으려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돈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할까. 


돈 때문에 경쟁을 하는 세상이다. 학생들이라고 다를 게 없다. 학교가 가르치는 것은 친구와 잘 지내기가 아니라 옆에 있는 친구를 경쟁자로 삼아 누르고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청소년기부터 이런 경쟁체제를 경험했으니 자연스레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고 발버둥 친다. 청소년들은 학교에 배우러 가지 않는다. 싸우러 간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이 흐름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갔다. 앞에서 맥락을 설명하느라 돌아오긴 했지만, 이번 글에서 학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말하려 한다. 지금의 학교는 지식과 정보만을 전달하는 공간이다. 조금 더 살을 붙이면 지식, 정보를 주며 학생들이 경쟁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그러나 학교가 이래서는 안 된다.


거두절미하고 지금의 학교 교육은 잘못되었다. 물론 개개인의 특별한 교육을 하시는 선생님도 계신다. 하지만 이런 분들의 휴머니즘에 기대기엔 교육체계가 망가져 있다.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다. 사람이 살아가며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도 모자랄 마당에 개개인으로 살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학교 교육이 안겨주는 비극이다. 학교에 간 학생들은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 축제나 동아리 활동을 금지하면 할수록 그 학교는 인정받는다. 다시 말해 반교육적이면 인정받는다.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며 주체성을 기를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좋은 학교다.' 학생들은 개개인으로 남지 못한다. 자신의 주체성을 잃은 채 살아간다. 


나는 이런 시스템이 진절머리 난다. 공부만 잘하고 돈 많이 벌면 끝인 사회시스템이 이해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행복의 기준을 우정, 기쁨 등으로 삼았다면 현재는 오로지 돈이다. 돈이 많아야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고 그게 곧 행복한 것이다. 자연스레 행복해지는 사람은 극소수일 수밖에 없다. 돈을 많이 벌려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하니까. 남을 밟고 올라선 사람은 적다. 1%의 사람이 99%의 사람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1%의 사람들은 돈이 많아서 행복하다. 


내가 바라는 학교는 학생들이 사회로 날아오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곳이다. 친구들을 만나며 서로 소통하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을 배우는 공간이다. 상술한 행복의 기준인 우정, 기쁨이 깃들어 있는 곳이 바로 학교다. 이런 공간에서 자란 아이들은 행복할 수밖에.


학교에서 요리하는 법, 집을 짓는 법,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법,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법,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면 한다.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는 나는 이런 것을 배우고 터득했지만 공교육의 학생들은 사회에 나가서 더 크게 부딪히고 아파하며 뒤늦게 배울 것이다. 학교는 사회로 날아오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곳이다. 학교에서는 실수해도 괜찮다. 그러기 위해 학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학교는 학생들을 보듬어주기 위해, 날갯짓을 도와주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학창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무엇이 기억나는지 묻고 싶다. 칠판에 빼곡히 적힌 글씨? 내 앞에 보이는 교과서? 많은 게 떠오르겠지만, 사람이 가장 많이 기억나지 않을까? 나에게 큰 배움을 주신 선생님, 나와 함께 웃어주었던 친구, 교문 앞에서 안전을 책임져 주시던 수위 아저씨.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가 계속해서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무료'로 느낄 수 있는 곳이 학교다. 사람들을 만나며 세상과 만날 준비를 하게 해주는 게 학교가 해야 할 일이다. 


사람들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섞여야 한다. 학생을 남녀, 성적, 장애, 부와 빈곤을 상관 말고 섞이게 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함께 웃어야 한다. 돌아보면 기억나는 사람들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말 그대로 배우게 된다. 중요한 건 함께다. 함께 있으면 진정한 자신에 대해서도 알아갈 수 있다. 입시에 짓눌려서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사유를 함으로써 남녀, 성적, 장애, 부와 빈곤 등은 결국 우리들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것밖엔 안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함께 지내면 학생들은 본인의 시간을 온전히 본인을 위해 쓸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다. 


만약 '나쁜 아이'가 주는 영향을 걱정하는가? 적어도 내가 볼 땐 좋은 환경에서 '나쁜 아이'가 나오진 않는다. 만약 '나쁜 아이'가 있다면 그것은 '나쁜 아이'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섞이는 게 낯선 것이다.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니 격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은 '나쁜 아이'가 아니다. 살아가는 게 아직은 서툰 아이다. 그런 아이들도 살아갈 수 있게 가르쳐주고, 보듬어주어야 한다. 사람을 만드는 교육은 바로 이걸 뜻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나중에 돌아봐서야 우리가 배웠다고 느끼게 된다. 후에 돌아봤을 때 학교가 얼마나 기억에 남을까.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학교를 졸업하고 살아갈 때 학교에서 배운 것을 떠올리며 학창 시절을 회상하지 않을까. 학생은 배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인생의 긴 과정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걸 배우는 것은 불안해할 게 아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우리는 입시란 압박을 주는 학교가 아닌 살아가는 법을 알려줄 배움터가 필요하다. 


돈. 그게 행복의 기준이 돼선 안 된다. 함께 지내온 추억들,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방법들을 익히며 해내는 기쁨이 행복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학교에선 돈을 위한 입시를 다루지 않고 함께 지내고 살아가는 것의 기쁨이 어떻게 행복이 되는지 가르쳐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유토피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희망을 갖고 있다."
- 이반 일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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