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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Jul 19. 2022

그리움은 여름밤의 풀잎 향기처럼

그리움의 힘에 대하여

1.

  어젯밤에는 여름의 첫 매미가 울었다. 베란다 창밖에 갑자기 날아와서는 귀를 찢을 듯 울었다. 다가가서 쫓아보내려고 했는데 여름 한철 울고 가는 운명이 안쓰러워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떤 슬픔과 절망이 있길래 저렇게 온몸으로 우는 걸까? 여름밤의 작은 풀잎들과 함께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리운 것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읽다만 작년 시 창작 수업 아이들 문집을 다시 펼쳤다. 나에게 편지를 쓴 아이가 있었다. 


"저는 여전히 선생님과 함께 했던 4월 5일을, 9월 16일을, 10월 14일을 떠올려요. 차가운 바람 앞에서도 햇살만은 기죽지 않았던 도서관 앞에서의 봄날을, 창 너머 초록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그 자체로 음악이 되었던 여름날을, 발맞춰 천천히 걷던 가을날을, 여전히 자주 떠올리고 생각해요. 제게 희망과 사랑을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제 사랑은 여전히 많이 허접하고 투박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실하고 힘이 있어요.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사랑이 제가 죽지 않고 살아있게 저를 지키고 있고요. 저는 언제나 그렇게 선생님 곁에 남을 거예요"    


  밀란 쿤데라는 '시는 존재의 한 순간을 잊을 수 없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한다'라고 했다. 시 창작 수업의 글쓰기는 '쓴다는 행위'보다는 '그리운 것들을 불러와 종이 위에 흘려보내 주는 일'이었던 것 같다. 나와 만난 날짜를 기억하고 그때 함께 했던 일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아이, 그것을 '자주 떠올리고 생각하는' 행위 안에 시의 마음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떠올리는 것이고 떠오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만일, 그리움에 대해 쓰고 싶다면 그리움 자체를 설명하기보다는 그리웠던 순간을 떠올리고 그때의 풍경, 소리, 냄새, 사람들, 시간과 공간, 식물과 동물, 사물들, 촉감, 음식, 날씨와 계절에 대해 구체적으로 써보는 것은 어떨까? 아름다움은 언제나 구체적이고 사소한 것들에 깃들어 있고, 어떤 여름밤의 바람과 풀냄새, 별과 달, 함께 걷던 길에도 사무치는 그리움이 묻어 있을 수 있으니까. 꽃이 아니라 동백꽃, 동백꽃이 아니라 '선운사 동백꽃'으로 써보면 어떨까? 



2. 

  언젠가 졸업생이 시 창작 수업의 공기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며 다급하고 슬프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맥락이 삭제된 채 단어로만 남겨진 시 창작 수업을 슬퍼하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맥락 속에 있고 흐름 속에 존재한다. 과거의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듯, 지금의 너도 너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순간에 있지만 영원에도 있다. 단어는 문장 안에서 이해되고 문장은 글 안에서 빛이 나며 글은 삶 속에서 투명해지고 삶은 나 자신을 통해서만 아름다워진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그의 고통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슬픈 소식이 하나 있어요. 이제 시 창작 수업의 분위기를 묘사하기가 힘들어요. 선생님이 본관에서 고등학교 2학년층까지 계단 하나하나 밟을 때마다 되새기셨던 그 문장들이요. 그렇게 열심히 공책에 기록했는데, 단어만 남기고 그날의 날씨, 우리들의 눈빛, 선생님의 불면증, 교실의 분위기는 떠나고 있어요. 맥락이 없는 단어가 무슨 소용일까요."


  그러나 올해 겨울, 그 아이는 먼 나라 독일에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편지를 또 보내왔다. 편지는 '편지지가 너무 작지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본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들려드리고 싶어요'로 시작한다. 어떤 그리움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지며, 보고 싶어 애타 하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삶을 일으켜 세우고 움직이게 하며 시도하게 하는 강한 희망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아이의 편지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혹시라도 전해 들으셨을지 모르지만, 저는 8월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생물학(생물다양성)을 공부하러 독일 동쪽, 드레스덴 공대에 왔어요. 지금은 괴를리츠라는 작은 도시에 살고 있어요. 독일어를 거의 못해서 거리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는 저에겐 아주 고요한 곳이에요. 얼마 전에 우연히 선생님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어요. 

  선생님의 말투대로 써진 글을 읽으면서, 교실에 앉아 시 창작 수업을 듣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때보다 더 그리운 기분으로요. 이상하게 처음 듣는 얘기들인데도 선생님께서 해주시는 이야기, 그 목소리로 듣고 있으면 그리운 기분이 들었어요. 알고 있던, 잊어버렸던, 소중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느낌이에요. 

  누군가 저에게 "이런 게 소중한 거야, 중요한 거야" 하고 콕 찝어서 알려 주진 않았지만, 그리운 기분이 드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기억을 떠올리고 다시 발견하는 게 좋아요."


  나는 큰 지도를 사서 펼치고 독일의 동쪽 괴를리츠를 찾았다. 손가락으로 그 작은 도시를 짚고서 한참 동안 아이와 나의 시 창작 수업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아이가 귤껍질에 편지를 적어 내게 건네주던 날도 떠올랐다. 생일날 교무실에 찾아와 생일 축하 노래를 수줍게 불러주던 날도 떠올랐다. 문득 눈물이 났다. 


  아이의 편지는 이렇게 끝이 난다.  


   "편지가 잘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선생님

    그리움을 담아, 독일 괴를리츠에서 

    00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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