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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Oct 10. 2022

우리, 겨울이 와도 끄떡없네

1.

  오늘 너와 내가 만났다면 우리는 온종일 비와 구름, 달라진 날씨와 옷차림에 대해 말하면서 하루를 보낼 수도 있었다. 네가 약국에 가야 한다고 말할 때 감기약을 사러 가는지도 말할 수 있고 오늘은 따뜻한 커피가 어울릴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혼자 집으로 돌아가던 유년의 가을날과 그날 발밑에 쌓이던 노랗고 붉은 나뭇잎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뺨을 맞은 것처럼 나쁜 말을 들었던 기억이나 좋지 않은 성적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던 어떤 날을 말하다 문득 눈물을 글썽일 수도 있다.    

  그보다 더한 몸과 마음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숨 쉬기 어려운 가슴의 통증과 어지러워 가누기 힘든 몸, 끝없이 가라앉는 우울과 끝내 사라지고 싶은 무기력과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    

  갑자기 날씨와 온도가 달라진 오늘처럼, 갑작스러운 삶의 불행 앞에서도 너와 내가 만날 수만 있다면 슬픔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생의 모든 불운과 싸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함께 옷장에서 겨울의 옷과 이불을 꺼내어 빨래를 하고 불이 지펴진 따뜻한 마루에 널어놓은 후 저녁 무렵 예쁘게 옷을 개어 놓으며 말할 것이다. '이제 겨울이 와도 우리 끄떡없겠네'     


2. 

  내일은 이른 아침 시 창작 수업이 있다. 내일 칠판에 쓸 문장은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소설가 이자크 디네센의 문장을 인용하여 쓴 것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문장은 시 창작 수업이 시작이 된 2006년부터 이 수업의 마음과 정신을 이루는 오래된 문장이 되었다. 우리는 이 수업에서 언제나 슬픔에 대해 쓰면서 동시에 슬픔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슬픔을 견뎌가고 있다.  


  지난 시 창작 수업 글쓰기 주제는 ' 당신에게 보내는 부치지 못한 편지'였다. 한 아이는 이제는 헤어진 옛 여자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내가 너를 계속 옆에 둘 수는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병으로 인해 상대방이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으리라. 거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 테지만 담담히 글을 읽어 나가는 아이가 견디고 있는 어떤 슬픔을 교실에 있는 우리는 모두 느꼈을 것 같다. 

  앞선 시 쓰기에서 아이는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던 나날들'. 아마 그녀를 만나기 전의 아이는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채 외롭고 쓸쓸한 마음과 영혼으로 살았으리라. 그러나 그녀를 만나고 난 후 아이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다. 아이는 내가 너를 사랑했던 나날이라고 쓰지 않고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던 나날이라고 썼다. 그녀의 사랑은 아이를 바꾸고 변화시켰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마법처럼 바꾸어 놓는다. 

  두 사람은 헤어졌지만 아이의 마음에는 오래 그녀의 사랑이 남아 있다. 아이는 9월의 수업 시간, 사랑받아본 경험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사람이 나를 꽉 안아주었을 때'. 이 수업의 모든 글쓰기와 질문과 이야기가 모두 그녀를 향해 있었던 것이다.  

    

3. 

  고통과 함께 하려는 마음은 서로를 알아본다. 슬픔은 언제나 그 슬픔을 함께 견디고자 애쓰는 마음 또한 불러오기 때문이다. 당신의 구체적인 슬픔에 응답하고 연대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추위, 느닷없는 삶의 고통 앞에서 내가 당신을 지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삶의 고통으로부터 삶의 허무로부터 당신을 지키기 위해 당신 곁에 언제나 있는 일을 다시 시작한다. '겨울이 와도 끄떡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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