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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Oct 15. 2022

'시와 햇살만 지니고서  북극을 여행하자고'

1.

  어제 금요일 아침, 고1 '재이'가 교장실에 부끄러운 얼굴을 하고 살며시 들어왔다. 그날 나는 좀처럼 낫지 않는 병으로 힘에 겨워하고 있었고, 아이들이 겪는 고통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걱정하고 있었으며 10월의 끝무렵에 이르러서 감지하는 삶의 고단함으로 지쳐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올 때마다 기쁘고 행복했던 날들보다 아리고 슬펐던 순간들이 더 많이 떠오르는 건 여전히 내가 연약하고 가녀린 부서질듯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 같다.

  이해받지 못하는 마음과 원망 같은 것들, 서러움과 쓸쓸함 같은 것들이 교장실에 들어온 노랗고 하얀 햇살만큼이나 깊어지려던 찰나였다. 나는 너무 깊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작은 교장실을 왔다 갔다 하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고, '아, 너무 추워' 하고는 회색 목도리를 꺼내 다시 목에 두르고 있었으며, 목요일에 시 창작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느라 비어 있는 책꽂이에 어떤 시집을 가져다 놓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2.

  그때 재이는 작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교장실 문을 열고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수줍게 고1 '화법과 작문' 시간에 감사패를 쓰는 시간이 있었고 나에게 주려고 가져왔다고 했다. 아이도 나도 아무 말 없이 부끄럽게 웃기만 했다. 그 짧은 순간, 교장실을 채웠던 어떤 온기를 내내 기억하고 있다. 서로 마주 보고 미소 짓고 웃기만 해도 거기에는 어떤 관계와 사회와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나는 재이와 나 사이에서 태어나고 만들어졌던 그때의 그 공기와 분위기를 오래도록 눈물겹게 기억하고 싶다.

  재이는 두 손으로 감사패를 내게 전달했고 나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두 손으로 감사패를 정중히 받았다.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따뜻한 이불속에 오래 넣어두었던 뜨거운 밥공기처럼 묵직하고 깊은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감사와 위안의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이에게 꼭 답장하겠다고 했다.

  나는 학교에서 오는 길에 아이가 내게 준 것과 같은 나무액자를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액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소매로 유리를 닦았다. 가을의 저녁노을이 하늘에 퍼져 가고 있었고, 서둘러 흙으로 돌아가는 나뭇잎들도 있었다. 11월이 오면 이제 나뭇잎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가거나 거리를 헤매거나 빗자루 끝에 걸려 어디엔가 담기거나 하늘 위를 떠돌아다닐 것이다. 그러나 추운 겨울이 오고 북쪽의 바람이 찾아오고, 눈보라가 내리는 어느 밤에도 끝끝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마지막 잎사귀처럼 나도 살아가고 싶다는 작고 소박한 마음이 바닥에서 조금씩 작은 불꽃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3.

  재이의 감사패에는 모든 아름다운 시가 지니고 있는 어떤 시의 마음 같은 것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랑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끝내 나와 너를 연결 지으려는 은유의 마음이라고도 생각한다. 재이와 나는 서로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는 이 시의 제목을 이렇게 썼다. '알면 사랑하고, 몰라도 사랑하는'. 알면 사랑할 수 있으나 서로 몰라도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다고.

  도대체 이런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디에서 이 따뜻하고 깊고 정답고 씩씩한 마음은 오는 것일까? 나는 그날 제목을 읽자마자 오래 울었고 지금도 눈물이 나와서 더 쓰지 못하겠다.

  재이의 마음이 정갈한 한 글자 한 글자 글씨의 시작과 끝마다, 자로 잰 것 같은 자간과 행간의 일정한 간격의 정성스러움으로 오래 남아있으며, 그보다 내 희망과 사랑과 아름다움과 슬픔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채 다 알아버린 아이의 사랑의 마음을 오래 눈물겹게 간직하고 싶다. 여기에 재이의 마음을 옮긴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당신과 내가 모르는 당신에게 이 글의 모든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낸다. 내가 당신을 알고 있으니 사랑할 수 있으며, 내가 당신을 몰라도 이제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4.      

  알면 사랑하고 몰라도 사랑하는


어제는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아직 당신을 잘 모르는데도요

많은 이들이 계절을 바라보며 당신을 떠올립니다


당신은 매일 풀꽃을 다시 거머쥐는 듯합니다

시와 햇살만 지니고서 북극을 여행하자고

떨리는 음성으로 사랑을 건네시지요


겨울 나뭇가지를 삼킨 저인데도

호수같은 눈가 앞에 곧잘 울어 버리곤 합니다

당신 때문에 미움을 모르는 바보가 늘어납니다


어김없이 이 길목에는 당신이 있습니다

저는 제 존재를 힘껏 굽혀 인사 드리고

돌아서서

오늘은 어떤 마음을 들켜버린 것일까 겸연쩍습니다


풀꽃 지지 않은 가을 여기에서

재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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