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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Oct 22. 2022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한 단 하나의 눈송이'

1.

  씨네 21 기자 김혜리는 <묘사하는 마음>에서 겸손하게 이렇게 썼다.


  '내게 해석은 묘사의 길을 걷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전망 좋은 언덕과 같았다. 묘사하는 마음이란, 그런 요행에 대한 기대와 '아님 말고, 이걸로도 족해' 하는 태평스러운 태도를 포함한다. 묘사는 미수에 그칠 수밖에 없지만, 제법 낙천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저자는 '묘사하는 마음'을 '요행'과 '태평', '미수'와 '낙천'이라고 겸허하게 표현했지만 서둘러 해석과 결론, 요약과 판단으로 나아가지 않고 처음 영화로부터 드러나는 사실, 그러니까 영화에서 있었던 일 그 자체에 성실하고 깊이 있게 들어가려는 태도는 영화뿐 아니라 모든 텍스트를 만나는 첫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론의 시선으로 텍스트를 납작하고 뭉툭하게 만들지 않고 묘사의 눈동자로 보이는 것을 응시하고 들리는 것에 귀 기울이는 태도를 갖기를 소망해본다.

  정확하게 읽으려고 애쓰는 마음은 사람을 만날 때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할 때, 그제야 당신은 내 앞에 나타나고 존재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 편지를 쓰고 업무와 관련된 일을 주고받을 때도 오늘의 날씨와 온도나 계절의 풍경과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많았다. 날씨와 계절의 전문가처럼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 순간을 묘사하여 당신에게 있는 그대로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마치 내 마음이 이 날씨와 계절과 같은 것처럼.

  

2.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글쓰기에서 고2 준휘는 이렇게 썼다. 


  내 유일하게 제일 선명하게 남아있는 초등학교 3학년 야구부 시절, 주말이면 신나서 야구를 하러 갔다. 가만히만 서있어도 땀이 뻘뻘 나고 쨍한 햇빛에 모두가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을 때 혼자 선크림 냄새가 싫다며 진한 갈색의 낡은 글러브 하나 챙기고 운동장으로 향했던 나.

  날이 너무 더워서 글러브 안에 땀이 가득 차도, 모자가 땀에 젖어도 그땐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한여름에 4시간 동안 야구를 했었다. 야구선수가 되겠다며 떵떵 소리치며.

  파랑색 야구복과 하도 많이 써서 얇은 면처럼 부드럽던 글러브. 흙바닥에서 대범하게 다이빙 캐치를 하며 무릎에 흉터 하나 더 남겼던 날들. 어쩌면 야구가 좋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편해서 기억에 남았는지도 모른다. 내게 몇 없는 마음이 편했던 기억.

  낡은 글러브 하나면 웃을 수 있었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다.   


  준휘는 유일무이하게 또렷한 기억으로 남은 야구부 시절을 자세하고 섬세하게 묘사한다. '진한 갈색의 낡은 글러브'는 너무 많이 써서 면처럼 얇아졌고 과감하게 몸을 날려 다이빙 캐치를 하는 바람에 무릎에는 흉터가 가시지 않았다. 글러브 안에 가득 차는 땀과 젖은 모자, 썬크림과 파랑색 야구복 그리고 한여름의 야구는 준휘가 그 시간에 얼마나 최선을 다해 집중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지만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우리는 아이가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야구가 좋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편해서' 준휘는 그렇게 열심이었다. 그것마저도 자신에게는 얼마 없는 마음 편했던 시간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이 아이가 글에 써놓지 않은 보이지 않는 어떤 순간들이 그려져서 조금 뭉클했다.

  대부분의 시간 마음이 편치 않았던 아이, 내면의 평화와 행복이 좀처럼 찾아와 주지 않았던 아이는 그나마 가장 마음 편했던 야구에 열심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의 '다이빙 캐치'가 내 마음에 오래 어떤 자국을 남겼다. 좋은 문장은 언제나 그 문장과 함께 어떤 인식과 감정이 실려온다. 말하지 않으면서 더 많은 말을 하는 것, 좋은 글은 글자의 앞과 뒤, 글의 이면과 맥락에서 무언가 따라오고 묻어 나오는 것이다.

  준휘는 얼마 전 시 쓰기를 하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야기를 또 썼다. 옆의 친구가 '너는 또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야기냐'라고 하자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지기만 했다.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시는 존재의 한순간을 잊을 수 없게 하고 견딜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한다.' 나는 아이의 침묵과 표정을 이 문장으로 이해하고 있다.   

 

3.

  첫눈이 올 것 같은 무렵, 시 창작 시간에 나는 아이들과 이 시를 함께 소리 내어 읽는다.   


눈보라 / 사이토 마리코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같이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다.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하나씩 눈송이를 뽑는다. 건너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 하고 그 애도 말한다.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 후 어느 쪽인가 말한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해도 절대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께 야단맞을 때까지 열중했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


  '운명적으로 뽑힌 눈송이 하나'를 눈동자로 따라가는 일,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몸과 마음으로 따라가는 일, 다른 모든 눈송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완전히 다른 오직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단 하나의 눈송이'를 따라가는 일.   

  다른 모든 것과 아주 비슷한 것 같지만 언제나 고유하고 특별한 단 하나의 당신을 오래 바라보고 알아차리고 이해하여 당신을 위한 일을 하는 것.  

  그렇게 사람을 만나보자고 그렇게 한 사람을 사랑해보자는 말없이 나는 시를 읽고 또 읽어주기만 한다. 그리고 첫눈이라고 생각되는 날, 우리가 다른 곳에 있더라도 마음의 목소리로 '정했어', '자, 이제 시작해보자'하고 말하고 이 놀이를 해보자고 말한다.


4.

  언젠가 당신이 떠난 길을 오래 바라본 적이 있었다. 책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길가를 따뜻하게 비추어준 적이 있었고 동그란 달이 그리움처럼 떠올랐던 적도 있었다. 횡단보도의 하얀 줄이 몇 개인지 세어본 적이 있었고 당신이 타고 떠난 버스의 이름과 색깔을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헤어진 후 갈 곳을 정하지 못해 분주한 거리에 오래 서서 밤하늘의 별을 멍하니 바라본 적이 있었고 벤치에 겨울바람과 같이 앉아 당신과 함께 나누어 가진 시집의 시를 외워본 적도 있었다. 당신이 아플 때 먹어야 할 약의 이름을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본 적이 있었고 당신의 고통을 해결할 확실한 방법 같은 것을 머리를 쥐어뜯으며 찾아본 적도 있었다. 그 길의 커피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몇 시간이고 반복 재생한 적이 있었고 크리스마스이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동차 불빛들이 성탄 트리의 전구처럼 빛났던 적도 있었다.   


당신이 떠난 길도 당신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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