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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Jan 04. 2023

아주 작은 목소리로
희망이라고 말했다.

1. 

  황현산 선생님은 『우물에서 하늘보기』의 <이곳의 삶과 다른 시간의 삶-작가 탄생의 서사>에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특별한 능력을 미학적 재능이라고 말하면서 어렸을 적 할아버지에게 들은 소금장수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어느 소금장수가 자염煮鹽을 굽는 섬의 부두에서 육지로 팔러 갈 소금을 한 배 가득 싣고 있는데, 곁에서는 낯선 방물장수 노파가 바늘을 팔고 있었다. 문득 그 바늘에 끌린 그는 여러 쌈지를 사서 품 안에 넣었다. 그런데 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돛이 부러지고, 소금장수는 목숨이라도 구하기 위해 소금을 모두 바다에 던졌다. 날이 개어 정신을 차려보니 배는 어느 낯선 땅에 닿아 있었다. 남은 것은 바늘 밖에 없었지만, 그 땅에 무슨 변고가 있었는지 사람들이 그 바늘을 사기 위해 거금을 들고 몰려왔다. 소금을 팔았을 때보다 수십 배 많은 돈을 더 번 소금장수는 새 배를 사서 고향으로 돌아와 부자로 살았다.


  이 이야기에서 핵심은 '문득 그 바늘에 끌린'이라는 구절이다. 선생님은 소금장수가 '모든 인간이 고루 지녔을 아름다움에의 본능에 의해 특별할 것도 없는 바늘에 매혹되었다'는 것과 '배 하나에 가득 찬 소금보다 훨씬 더 귀중한 다른 세계의 감각으로 바늘을 보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이 감각은 상상력이며 희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가르치는 일은 언제나 아이들이 희망을 바라볼 줄 아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이다. 희망은 추상이나 낭만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의 단어이다. 현실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 시도하고 실험하는 치열한 반복의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워진다. 세상이 왜 달라지지 않느냐고 세상은 이미 망했다고 냉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지고 변화하고 새로워지려는 노력이 있어야 세상도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지난 한 학기 시창작 수업에서 아이들과 나는 글쓰기를 통해 아름다움을 알아차리는 감각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명하는 상상과 미래를 희망하는 법을 함께 가르치고 배웠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수업이 되었다. 

        

2. 

  영화 <암살>에서 염석진은 "왜 동지를 팔았나?"는 질문에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라고 답한다. 염석진은 일본의 세상이 영원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 시대에도 해방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와 인간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희망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몸과 마음의 전부를 건 사람들이 있었다. 역사와 미래를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을 조금 더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는 아이들 속의 상처를 마주할 때 거기에서 반드시 아이의 개인적 상처를 넘어서는 '사회적 상처'를 만나게 된다. 사회와 세상과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주는 이 깊은 상처들을 어떻게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긴 회의와 환멸 끝에 이 질문을 다시 하고 있다. 어떻게 나의 아픔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3. 

  시창작 수업이 끝나고 수강생에게 긴 손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수줍고 부끄럽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저번에 선물 받았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서 저의 문장이 된 파트들을 이야기하고 끝내겠습니다. 10월, 광교호수공원에서 이 시집을 읽었더니 너무 좋더라구요. 좋아하는 페이지마다 한 귀퉁이를 접어두었더니 꽤나 두꺼워졌습니다. 맛깔난 시집을 추천해주신 선생님 최고--!!"

- 가을은 파란 모래처럼 쏟아지고 / 파란 모래

-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

   2022.12.21. 다경이로부터 


  이 시집은 다경이에게 가서 더 '두꺼운' 시집이 되었다. 다경이의 삶과 영혼이 더 두터워졌을 거라고 감히 나는 생각한다.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할만한 삶을 기어이 만들어 내고, 그 삶의 페이지마다 한 귀퉁이를 고이 접어 둘 때 우리 삶도 더 무겁고 두터워져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내 삶의 어떤 페이지를 접어두었던가. 그리고 거기에 나는 누구를 사랑했다고 적어놓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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