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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Nov 27. 2022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는  말의 뜻

1.

  우연히 청룡영화제를 TV로 봤다. 축하공연으로 가수 정훈희와 라포엠이 <안개>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때 객석에 앉아 있던 배우 탕웨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안개>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음악이었고 그녀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서래를 맡았던 배우이기도 했다. 배우의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짐작할 수 없지만 그 순간 그녀가 영화 속에서 자신이 연기한 서래로 다시 돌아간 것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영화에서 서래는 절망적이고 가혹하며 고단한 삶 속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슬픔을 겪어내고 있었으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해결하기 위해 끝내 어떤 선택을 하게 된다.

  배우는 때로 우리가 만났을 것 같은, 혹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어떤 사람의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 우리에게 그를 소개하고 우리가 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나는 영화 속 서래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영화의 힘 못지않게 많은 부분 배우의 연기의 힘에서 온 것이기도 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놀라운 배우가 서래로 살았다고 생각했고 영화제에서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때로 그 사람으로 살아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도 사람을 그렇게 만난 적이 있었다.


2.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 산을 20년 동안이나 그렸다. 이에 대해 시인 오규원은 <가슴이 붉은 딱새>에서 이렇게 썼다.


  "한 사람의 화가가 하나의 산을 20년 간 그렸을 때, 그런 경우 그가 '산'을 그렸다는 표현이나 자연에 대한 철저한 탐구라고 한 그의 말은 적당하지가 않다. 그는 '산'을 '살았다'고 해야 한다!"


  세잔이 같은 산을 20년이나 그린 이유는 '표현'과 '탐구'에 있지 않고 '산과 함께 살았다'는 것에 있다. 대상을 표현하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살아야 비로소 우리는 그 대상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은 서래를 탐구하고 서래에 대해 표현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포에 온 서래도, 다시 힘든 남자를 만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서래로 살아볼 수 있게 되었고 그제야 자신의 말이 그녀에게는 사랑한다는 말로 들렸으리라는 것을 후회하고 탄식하며 알게 된다.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선입견과 관념과 당위로 타자를 규정하지 않고 그가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그의 불가피함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그의 고통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사람과 그렇게 살 수는 없겠지만 사랑하는 것, 사랑하고 싶은 것과 함께 살아가려는 애씀과 노력은 언제나 애틋하고 용감하다.

  하여,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의 마지막 행동은 슬펐지만 씩씩했다. 불가능한 사랑과 어떻게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서래의 용기 있는 응답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서래는 해준에게 자신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붕괴되었다'라고 말한 해준을 정확히 이해했고 그의 삶과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를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심했고 그대로 행동했다.



3.

  시인 오규원은 "언어가 불완전한 것이기에 시인은 더욱 언어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며, 언어와 더불어 살며, 죽은 현실에 사랑을 부활시켜야 한다" 고 다. 불완전하고 부족하니까 강요하고 비난하고 평가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짐, 그래서 불완전한 당신과 연약한 내가 함께 씩씩하게 살아가면서 죽어가는 우리의 삶에 다시 사랑을 되살려야 한다는 마음을 간절히 가지고 싶은 겨울 일요일 아침이다.


  시인 오규원은 2007년 2월 2일 오후 5시 10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영면했다. 그는 병상에서 제자였던 시인 이원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마지막 시를 남겼다고 한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속에서 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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