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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Feb 05. 2023

너의 밑에 있는 사랑

1.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딸아이는 토요일에 처음으로 댄스학원에 춤을 배우러 갔고 학원이 끝나고 나서는 혼자 맘에 드는 옷을 샀고 음료와 빵을 사 먹었으며 혼자 노래방에 가서 좋아하는 노래도 불렀다. 춤을 추는 딸아이의 동영상을 오래 바라봤다. 네가 어느새 이렇게 자랐구나. 아이가 부모로부터 천천히 독립하는 것,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오래 생각했다. 이제 이 아이는 벌판에 서서 비바람을 혼자 맞아야 할 텐데 나는 그 벌판의 어디쯤 작은 언덕이 되어 주고 싶다. 아이가 때로 마음과 영혼을 비빌 수 있는 따뜻하고 든든한 언덕이 되어주고 싶다.   

  자신이 산 옷을 하나씩 나에게 자랑스럽게 설명하며 모델처럼 멋지게 포즈를 잡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오래 했다.   


2.

  해가 조금 길어진 일요일 저녁, 진은영의 시집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 있는 시 <봄여름가을겨울>을 읽는다.


   작은 엽서처럼 네게로 갔다. 봉투도 비밀도 없이. 전적

으로 열린 채. 오후의 장미처럼 벌어져 여름비가 내렸다.

나는 네 밑에 있다. 네가 쏟은 커피에 젖은 냅킨처럼. 만

개의 파란 전구가 마음에 켜진 듯. 가을이 왔다. 내 영혼

은 잠옷 차림을 하고서 돌아다닌다. 맨홀 뚜껑 위에 쌓인

눈을 맨발로 밟으며


  내가 너에게 갈 때, 너를 만나고 너를 좋아하고 사랑할 때, 나는 나를 봉투처럼 감추고 있지도 않고, 엽서처럼 비밀도 없다. 숨겨둔 다른 생각도 네가 나에게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의도도 없다. 내가 너로 인해 힘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우리의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산하지 않는다. 나는 '전적으로 너에게 열려있다.' 그리고 그렇게 너를 향해 열려 있는 나의 사랑은 어느 순간 '오후의 장미처럼 벌어져' 여름의 비를 축복처럼 시원하게 내려준다.

  나는 너의 위에서 군림하지 않고 너의 밑에서 보이지 않게 살며시 너를 받쳐주고 있다. '네가 쏟은 커피에 젖은 냅킨처럼' 나는 너의 실수와 상처를 대신하는 가장 작고 하찮은 냅킨이 될 수도 있다. 네가 쏟은 커피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빨아들이는 냅킨의 운명이 기꺼이 될 수도 있다.  

  하여, 이 사랑은 봄과 여름을 지나 마침내 '만개의 파란 전구'가 가득 켜지는 가을을 불러온다. 가장 순수하고자 노력하는 나의 사랑이 결국 당신의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생명의 파란 전구를 켜지게 한 것이다.

  겨울이 오고 날은 춥고 눈이 매섭게 내리더라도 나는 여전히 '잠옷 차림'으로 '쌓인 눈을 맨발로 밟으며' 너를 만나기 위해 '돌아다닌다'. 언제 너를 만날지 모르니 너를 만날 때 나는 계속 가장 순수한 사랑이어야 하므로. 잠옷이어야 하고 맨발이어야 하므로.


  띄어쓰기 없는 이 '봄여름가을겨울'은 그래서 언제나 변함없는 어떤 사랑의 태도 같은 것을 전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깊은 사랑은 끝나지 않을 것이므로 계절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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