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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Feb 18. 2023

무에서 피어날 무꽃을 기다리기

1. 

  하루종일 하늘이 어둡다. 의자에 앉아 잠깐 졸았는데 슬픈 꿈이었다. 살아가는 것도 가끔 눈물인데 꿈까지 슬퍼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잠에서 깨어 여전히 회색빛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온통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다.


2. 

  어떤 생각과 마음이 깊어지면 온종일 다른 일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환기와 전환이 점점 힘들어진다. 주로 그런 생각들은 억울함이나 상처, 슬픔이나 분노와 관련된 것들이라 떠올리고 복기할수록 내가 나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벗어날 방법과 무기가 나에게는 아직 없는 것 같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으니 내 삶이 조금 가여워지기도 한다. 


3. 

  1학기에 시창작 수업을 신청한 학생이 서른두 명이라고 담당 부장님이 이야기해 주었다. 넓은 교실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하면서 어디가 좋을지 물어왔다. 그러면서 수강생 수를 더 줄이기 위해서 노력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아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수업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그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동시에 나는 어떤 마음이어야 할지 생각했다. 아! 나는 아직 수업할 준비가 되지 않았구나. 내가 시를 사랑하고 있어야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칠 수 있다. 내게 희망이 있어야 당신에게 미래를 말할 수 있다. 

 

4. 

  정주희 작가가 쓰고 그린 그림책 <꽃이 필 거야>는 텃밭에서 피어나고 자라나는 꽃들을 아이의 눈동자로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토마토꽃, 돼지감자꽃, 양파꽃, 참깨꽃....  이 꽃들은 모두 하나하나 태어난 의미가 있고 존재의 가치가 있다. "한들한들 살랑살랑 무꽃이야. 꼭 발레리나 같아. 바람소리에 맞춰 우아하게 춤을 추잖아." 작가는 꽃 하나하나를 이렇게 다른 것으로 비유해 주었다. 비유는 대상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기도 한다. 아름다운 것은 다른 아름다운 것을 불러오고 싶게 한다. 

  채소에서 피어나는 꽃을 부드럽고 따뜻하고 온화한 색연필로 섬세하고 정밀하게 그려낸 그림들에서 나는 작가가 이 꽃들을 얼마나 예뻐하고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작은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자 아이들은 모두 신기해했다. 토마토에서도 고구마에서도 양파에서도 꽃이 피어나다니 아이들은 눈동자가 동그래져서 직접 심어보고 싶다고도 했다. 나는 아이들 모두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우리가 마당 어딘가에 저 식물들을 함께 심고 꽃이 피어나는 것을 같이 볼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그림책의 꽃들 중에 무꽃을 알고 있다. 아주 어렸을 때 혼자 키웠던 기억이 있다. 마루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속에서 반짝반짝 분홍빛으로 빛나던 동전만큼 작았던 무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올봄에는 다시 무꽃을 길러봐야겠다.     


5. 

  나는 마음이 있어야 일도 하는 사람이다. 일을 하든 사람을 만나든 작고 소박하더라도 진심이 있어야 하고 특별히 거기에 넘치지는 않더라도 사랑의 모습이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지금 나는 그 '마음'을 조금씩 채워가고 있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없고, 작은 것에도 흔들리고 괴로워하는 사람이지만 여전히 나는 무에서 피어날 무꽃을 기다리고 싶은 사람이다. 그 사랑과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며 토요일 밤을 맞이 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혼자이고 생활과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도 헤아릴 수 없지만 오늘은 감사한 것들을 떠올리고 싶고 그 감사함 속에 머물러 있고 싶고 더 많은 감사함을 찾아내고 싶다. 우선, 당신이 있어서 감사하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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