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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Feb 18. 2023

'기쁨에 모험을 걸어보자'

1.

  나는 일상의 무심한 표정 안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상처와 슬픔과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지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우리의 슬픔을 누군가가 이해하기는 어려운데 왜냐하면 우리조차도 우리의 슬픔을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2학기 시창작 수업의 과제를 어제 제출한 학생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쓴 글쓰기 노트였는데 마지막 장에는 나에게 쓴 편지가 있었다. 아이는 "내 상처와 두려움을 꺼내놓아도 이해받을 수 있고 내가 부끄럽고 서투르더라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쓰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도 생겼다"라고 말했다.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는 일이었던 편지도 지금은 마음 그대로 있다"고도했다.

  여름에서 겨울까지 아이들과 나는 이 말해지지 않고 말할 수 없는 마음의 비밀들을 종이 위에 펼쳐놓는 일을 한 거였구나. 나는 새삼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섬세하면서 두려운 작업에 대해 조금 무서워지기도 했으나 나는 아이가 연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오래 바라보며 '다행이다'라고 혼잣말을 했다. 감사하게도 아이가 편지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기 때문이다.


  "꽃이 곧 펴요!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펴서 봄이 온다고 하셨던 게 자꾸 맴도는 2월이에요. 3월이 오고, 여름이 오고, 다시 겨울이 와도 진실만을 말하던 선생님의 눈은 잊지 못하고 언제나 보고 싶을 것 같아요. 그때까지 아프지 않기로 해요. 우리."  


  아이는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 잊지 못하는 것, 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진실에는 그런 힘이 있다. 마음을 다한 사랑은 인생의 어느 한 때였어도 오래 남아 잊을 수 없다. 아이는 아프지 말자고 담담하게 부탁했다. 그리고 '우리'라고 말했다. 우리...  


2.

  하늘이 어둡다. 나는 지금 루이즈 글릭의 시집 <야생 붓꽃>을 들고 있다. 꽃의 이름과 목소리로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시들로 가득하다. 루이즈 글릭은 고등학교 때 섭식장애로 고통을 겪었고 병을 치료하는데 10대와 20대의 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 나날들 동안 시인은 다른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손가락으로 세상을 만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시집의 꽃들은 모두 작고 소박하며 우리처럼 실패와 절망, 환멸과 상처를 안고 피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간다. 그러나 거기에 삶과 생명과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꽃은 가장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태어나 대지를 뚫고 세상 밖으로 솟아나고 피어난다. 하여 시인은 '야생붓꽃'에서 이렇게 썼다.



  시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 내 고통의 끝자락에는 이제 문이 하나 생겼다. 당신들은 나에게 계속 내 삶이 죽음이라고 말해왔지만, 내 삶을 평가하고 의심하고 비난해 왔지만, 이제 당신들은 내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 한때 나는 땅 밑에서 어두운 대지에 파묻힌 채, 자유도 생명도 나 자신도 없는 채 살아갔고 그런 삶은 고통스럽고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영혼은 있지만 말을 하지 못했던 상태, 내 언어와 목소리가 없었던 시간을 이제 끝냈다. 나는 딱딱한 대지를 뚫고 새가 빠르게 날아가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왔다. 그래서 이제 당신들에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내 목소리를 찾았다고. 나는 당신들의 말에 지지 않았다고. 나는 씩씩하고 용감하게 내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3.

  오늘의 당신은 그 야생붓꽃처럼 새로운 세상 속에 있고, 이제 꽃을 더욱 꽃답게 만들 수도 있다. 루이즈 글릭의 또 다른 시 '눈풀꽃'은 이렇게 끝이 난다. 당신에게 들려준다.


“그래요, 기쁨에 모험을 걸어보자고요. 새로운 세상의 맵찬 바람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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