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나무에 물을 주는 저녁
사랑을 다르게 말해보기
1.
영화 <헤어질 결심>의 정서경 작가는 한 TV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쓴 시나리오를 보면 사실 전부 단어들이 운동을 갖는 동사, 또 형태를 묘사하는 형용사로 되어 있어요. 제가 스크린에서 보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은 안 쓰거든요. '사랑해'라는 말에는 실체가 없거나 모호해서 무엇으로 번역이 되어야 하는지 헷갈릴 때가 많죠. 어떤 말들이 '사랑해'라고 읽히면 좋죠. 하지만 사랑해라는 말을 쓰면 그게 거기서 너무 끝나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사랑 이야기를 해보자. 어떻게 하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 안에서 행동과 동작을 보여주는 말로 사랑한다는 말로 들리게 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은 종종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애매모호하고, 무엇보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다양하고 미묘한 감정들과 무수히 많은 행동의 의미들은 거기에서 멈춰버린다. 더 흥미진진하게 계속되어야 할 이야기가 싱겁게 끝나 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작가도 그렇지만 현실에서도 사랑한다는 말이 아닌 다른 말을 찾는 과정은 더 정확하게 사랑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랑의 감정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은 비밀로 간직하고, 어떤 것은 사랑한다는 말과는 사뭇 다른 표현을 찾기 위해 애써야 하지 않을까?
영화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차우(양조위)는 앙코르와트 고대 사원의 작은 구멍에 얼굴을 대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떤 말을 속삭인다. 햇살은 눈부시고 구멍에는 작고 오래된 풀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가 거기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말이 첸(장만옥)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어떤 말이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와 그녀의 사랑이 사랑 그대로 훼손되지 않은 채 영원할 수 있도록 긴 비밀의 역사를 간직한 오래된 사원에 봉인해 두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에 대해 '걸음걸이 하나에도 사랑을 눌러담은 영화'라고 말했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모든 발걸음에는 정말 사랑이 아프고 무겁게 깃들어 있다.
그러나, 사랑의 말에 대한 노력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의 마음, 그리고 그 사랑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가지는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마음 또한 이해하고 싶어 진다. 먼저 사랑한다고 말함으로써 계속 사랑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이 관계에서 영원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어 진다.
2.
그렇다면, 사랑은 어쩌면 작가의 이 말처럼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공동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제가 생각할 때는 관객과 언어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영화에서 생겨난 언어들을 관객들이 받아들이고 서로가 다른 이해로 돌려주면서, 마지막에는 관객과 저 사이에 하나의 사전이 생겨서 우리는 이걸 이런 뜻으로 하기로 하고 그게 뭉쳐서 의미가 된다고 생각해요.
<헤어질 결심>은 어떻게 보면 어떤 말을 사랑한다는 말로 보여주는 긴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죠."
영화가 작가의 언어와 관객의 언어가 서로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사랑도 결국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자신들의 연약한 언어를 통해 이해와 오해, 갈등과 긴장을 넘나들며 자신들만의 사랑의 의미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일 것 같다. 이 말은 그 의미에 도달해야 비로소 두 사람의 사랑이 의미 있어진다는 뜻이다. 의미는 두 사람의 사랑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의미에는 현실을 이기는 힘이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랑의 의미를 무어라 함께 정의할 수 있을까?
영화 <헤어질 결심>이 어떤 말과 행동이 결국 사랑한다는 말의 다름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긴 과정이었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을 오래 생각해 본다. 영화에서 서래와 해준은 결국 사랑한다는 말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때로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른 채. 그래서 둘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인정받기 어렵고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이었지만 이 사랑에는 사랑의 숭고함과 위대함, 품위와 존엄 같은 것들이 숙연하고 애틋하고 슬프게 아로새겨져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