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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라는 핑계

까먹대장

by 지개인

아차! 엄마에게 전화한다는게...

아, 맞다. OO이 국어학원 알아본다는 게...


둘째 등교 준비할 때부터 생각했는데...

그그전날부터 하려고 했었는데...

'엄마는 까먹대장이야.' 둘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른 아침 일어나 아침을 차리고 남편과 첫째를 배웅했다.

둘째를 깨워 아침을 먹이고 등교를 시켰다.

아침 설거지를 하고 내 공부를 시작했다.


잠시 후, '깨똑'...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아아들 옷 쇼핑몰을 보내왔다. 아이들 키, 몸무게, 나이, 취향을 고려해서 1번부터 60번까지의 옷을 하나씩 살펴본 후 두 세벌 정도를 골랐다.

딩동. 문앞에 택배가 왔다.

언박싱을 하고 주소 라벨을 떼어내고 내용물을 정리하고 빈 상자를 내어놓았다.

이제야 겨우 책 몇 줄 읽고 있는데 세탁기에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빨래를 널었다.

계란과 밀가루를 사러 마트에 갔고, 신선한 채소를 위해 야채가게를 들르고, 식육점에서 품질좋은 고기를 샀다.

집에 와서 장봐온 식재료를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속이 비어가는 중이었고 흐리멍텅한 식욕이 느껴졌다.

대강의 빵과 우유로 점심을 떼웠다.


바닥에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눈에 띄고,

가구와 바닥이 경계를 만드는 곳엔 엉클어진 먼지덩이들이 보였다.

어느새 손에 들려진 돌돌이가 그 위를 훑고 지나고 있었다.


곧 아이가 하교할 시간이었다.

아이에게 간식을 챙겨 먹이고 학원에 데려다 주었다.


저녁준비를 했다.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했다.

아이를 씻기고 재웠다.

TV를 보며 빨래를 개고


결국엔 잤다.


오늘 하루 나는 무엇을 하였을까?


'해야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은 늘 우선순위에서 충돌을 하지만 내키는 일에 무게를 싣는다면, 일상은 어긋나버린다. 주부이니까, 엄마이니까, 하며 따라붙는 수식어들은 본분에 대해 상기시킨다.

문득 생각한다.

결혼과 출산에 병행한 의무와 그에 따른 책임감을.


성숙의 가면 뒤로 본연의 '나'가 숨어있다.


치열하게 살진 않았지만 숨가쁘게 보냈던 하루가

엄마에게 전화하지 못하고, 첫째 아이 국어학원을 알아보지 못한 핑계로 남았다.

그 핑계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들리기를.

만만치 않았던 나의 하루 또한 당신들의 수고로움에 견줄만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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